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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직업은 안물안궁… “취미만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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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직업은 안물안궁… “취미만 공유합니다”

조건희 기자 , 윤다빈 기자 입력 2020-01-04 03:00수정 2020-01-0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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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세대에 인기 끄는 블라인드 모임
1일 서울 강남구 북카페 ‘아그레 라운지’에서 대부분 초면인 회원들이 이름만 밝힌 채 함께 독서 모임을 하고 있다. 이들이 책으로 얼굴을 가린 것은 익명 모임임을 강조하기 위해 연출한 것이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나이와 직업은 ‘안물안궁(안 물어보고 안 궁금하다)’이에요.”

살짝 ‘띵’했다. 이렇게 어색할 수가. 1일 오후 7시 반 서울 강남구에 있는 화사한 북카페 ‘아그레 라운지’가 갑자기 휑한 사막처럼 느껴졌다. 모두 7명이 둘러앉는 테이블. 첫마디가 이름만 말하고 신상은 밝히지 말라니. 누군가를 만날 땐 기계적으로 읊던 “35세, 2011년 입사, 기혼…”이 입가에 머물다 마른 침만 삼켰다.

이날 아그레 라운지에서 열린 자리는 흔하디흔한 독서클럽. 그런데 테이블 리더를 맡은 김유리 씨는 “서로 신상을 밝히지 않는 게 첫 번째 규칙”이란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당연하단 듯한 눈빛. 바로 요즘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모으는 ‘블라인드 모임’이다. 사람들은 가벼운 인사 뒤 곧장 책에 대한 대화로 들어갔다.



○ “친구와 나누지 못하는 대화도 자유롭게 나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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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렇게 딱히 인간관계에 치중하지 않고 취향만을 공유하는 데 초점을 맞춘 블라인드 모임이 2040세대에게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남들은 가족 친구와 시간을 보낼 새해 1월 1일부터 열린 ‘아그레아블 북클럽’도 전형적인 블라인드 모임. 2013년 처음 모였던 카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이 모임은 나이 학력 등 어떤 자격조건도 따지지 않고 가입할 수 있다. 다만 참가자는 모임 때마다 약간의 비용만 지불하면 된다.

아그레아블은 프랑스어로 ‘유쾌한’ ‘기분 좋은’이란 뜻. 이름처럼 만남도 산뜻하다. 회원들은 스마트폰으로 일정을 확인하고 참석해 각자 읽은 책에 대한 의견만을 나눈다. 대부분 서로 초면인지라 대화 주제가 신변잡기로 흐르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취미를 통한 인맥 형성’이란 기존 동호회 방식은 여기선 금기시한다. 한 참가자는 “3년 넘게 알고 지낸 회원이 있지만 나이조차도 서로 모른다”고 말했다.

이러한 블라인드 모임은 요즘 세대가 어떤 식의 만남을 추구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리서치업체 마크로밀 엠브레인이 지난해 3월 전국 성인 1000명을 설문한 결과 “학연과 지연보다 취향과 관심사에 의한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응답이 61.1%나 됐다. ‘관심사에 따라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만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30대(62%)와 20대(58.8%), 40대(48.8%), 50대(45.6%) 순으로 긍정적으로 답했다.

당연히 이런 모임은 주제에 제한이 없다. 요리와 화장법, 요가, 수제맥주 만들기 등 다양한 성격의 모임을 연결해주는 플랫폼이 스마트폰 앱이나 홈페이지의 형태로 속속 등장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익명 모임’이라고 검색만 해봐도, 수백 개의 익명 대화방이 곧장 뜬다. 이미 젊은 세대에겐 자생적인 블라인드 모임 자체가 자연스러운 문화란 방증이다.

모임도 사람 관계인데 너무 삭막한 건 아닐까. 하지만 블라인드 모임의 진정한 가치는 논쟁적 주제를 다룰 때 확실하게 드러났다. 이날 아그레아블 북클럽도 시종일관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최근 ‘힙’한 화두인 페미니즘을 다룬 책이 등장하며 후끈 달아올랐다. 한 여성 참가자는 “회사 동료나 친구와는 차마 못 하는 이야기”라며 “솔직히 페미니즘 콘텐츠에 쏟아지는 과도한 비난이나 찬사가 모두 불편하다”고 털어놓았다. 한 남성도 “영화 ‘82년생 김지영’도 보는 사람마다 감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요즘 호불호만 밝혀도 ‘네 편 내 편’으로 갈려 지인과는 오히려 이런 화제를 피한다”며 공감했다.

김유리 씨는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과감하게 속내를 펼칠 수 있는 게 바로 ‘블라인드 모임’의 최대 장점”이라고 귀띔했다.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뒤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시간도 예정됐던 대로 3시간 만에 깔끔하게 끝났다. 날이 날인 만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인사는 잊지 않았지만, 흔한 뒤풀이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 “인맥 관리보단 깔끔한 자기계발”

한 익명 대화방에서 번개로 만난 사람들은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영화나 전시회를 함께 관람한 뒤 ‘티켓 인증’을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처럼 인간관계보다는 취향을 나누는 데 집중하는 블라인드 모임이 젊은층에서 퍼지고 있다. 독자 이 모씨 제공
이런 블라인드 모임은 취미활동 성격의 만남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그저 익명 대화방에서 ‘번개’로 약속을 정해서 영화나 공연, 전시회를 함께 관람하기도 한다. 2일 한 모바일메신저에는 ‘서울시내 전시회 미술관 공연 정보 공유해요’라는 제목의 오픈 채팅방이 떴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닉네임으로만 모인 이용자 380여 명이 다양한 전시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각자 원하는 모임을 추천하면 운영자인 이 모씨는 그저 ‘후보’를 선정해 투표에 부칠 뿐이다. 보통 4명 이상이 참석 의사를 밝히면 번개는 즉석에서 이뤄진다.

이런 모임은 꼭 ‘동행 관람’을 원칙으로 하지도 않는다. 가끔은 모임 당일에 인파 속에서 닉네임으로 서로의 ‘존재’만 확인한 뒤 곧장 제 갈 길을 간다. “각자의 리듬에 맞게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란다. 그러다가 도슨트(전문적인 작품 안내인) 설명만 함께 듣거나 관람을 마친 뒤 찻집 등에서 만나 감상을 나누기도 한다. 역시 개인적인 얘기는 삼가고, 연락처도 서로 묻지 않는다. 이 씨는 “개인 신상을 모르는 채 대화를 나눠 보면, 서로의 감상을 더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고 말했다.

요즘은 ‘덕질(마니아 활동)’도 익명을 선호하는 팬들이 적지 않다. 한 아이돌그룹 멤버의 팬인 대학생 서지은 씨(24·여)는 지난해 SNS에서 만난 팬들과 8차례나 블라인드 모임을 가졌다. 공연을 본 다음, 심지어 통성명도 생략한 채 그룹 멤버들에 대한 얘기만 실컷 나누는 뒤풀이였다. 서 씨는 “대학 친구들은 내 취향을 이해하지 못해 기분 상할 일이 종종 생기곤 했다.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팬들끼리는 그럴 일이 없어서 편하다”고 전했다.

블라인드 모임은 ‘현실 도피용’으로도 꽤나 잘나간다. 특히 고단한 삶에 치인 ‘취준생(취업준비생)’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취준생들은 친구나 지인을 만나면 아무래도 취업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마련. 이런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지고자 블라인드 모임을 찾는다. 오랫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이던 J 씨(28·여)는 “최근 기업에 입사하며 이런 부담에서 벗어났지만, 백수생활이 길어졌을 땐 친한 친구도 멀리했다”며 “생면부지인 사람들과 ‘맛집 탐방’ 같은 모임을 갖는 게 훨씬 좋았다”고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이런 블라인드 모임은 요즘 2040세대의 성향에 딱 들어맞는 네트워크”라고 입을 모았다. 이전 세대에 비해 개인주의,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면서도 ‘인정 욕구’는 큰 특징을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람은 신상을 공개하는 순간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데, 이런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최대한의 만족을 누리려는 게 블라인드 모임”이라고 말했다. 집단주의를 구심력으로 삼는 모임은 아무래도 참가자의 사생활을 스스럼없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피하면서도 ‘내 사회성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입증하고 싶은 마음이 더해진 결과가 블라인드 모임에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인맥보단 본인에게 치중하는 트렌드도 한몫했다. 자신의 역량을 넓히는 일에 집중하며 더 큰 가치를 찾는다. 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의 최지혜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현 2040세대는 취업과 이직 경쟁이 극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짧은 여가시간을 가벼운 놀음으로 헛되이 보내기보단, 개인적 ‘업그레이드’에 쓰고 싶은 바람이 크다”고 진단했다.

조건희 becom@donga.com·윤다빈 기자
#블라인드 모임#아그레아블 북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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