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희망찬 ‘역사의 교훈’을 찾는다면Ⅰ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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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같은 관용구를 당연하게 쓰던 때가 있었다. 올해는 그 말을 쉽게 쓸 수가 없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독재로 가는 나라들은 ①위기 때 선출된 지도자가 ②계속 적(敵)을 만들어 공격하면서 ③사법부와 언론을 장악해서는 ④선거제와 헌법을 고치는 수순을 쓴다고 지난해 소개할 때만 해도(김순덕칼럼 ‘좌파독재 아니면 우파독재라고 해야 하나’), 설마 우리나라가 그리 가랴 했다.

다가올 ‘확실한 변화’ 불안하다

진짜였다. 작년 말 선거법과 공수처법이 국회 처리되면서 2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인사회 연설대로 ‘국정 기조의 큰 틀’은 바뀌게 됐다. 2020년엔 총선을 통해 ‘더욱 확실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으로서 헌법에 따라 권한을 다 하겠다”는 다짐을 보면 ‘윤석열 검찰’ 물갈이는 물론이고 대통령 발(發) 개헌도 가능할 것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여의도 국회에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가결되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지난해 12월 27일 여의도 국회에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가결되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그리하여 ‘공정사회’가 이뤄지고 ‘상생 도약’하여 ‘함께 잘 사는 나라’가 되면 정말 좋겠다. 우습게도 청와대공직기강비서관이 2년 전 당시 민정수석 조국의 아들 인턴활동확인서를 가짜로 만들어준 일이 검찰 공소장에서 드러난 상태다. 대통령이 국민에 대한 사과나 청와대 기강 단속은커녕 되레 검찰을 개혁한다며 칼을 휘두르는 판이니, 멀쩡한 정신도 돌아버릴 것 같다.

이젠 내로남불 같은 관용어(慣用語 아닌 官用語) 반복하기도 싫다. 청와대라는 권력기관이 국민 위에 군림하며 법과 공정과 신뢰를 농락하면서, 또 무슨 변화를 일으켜 남북 평화공동체까지 만든다는 건지 불안하다.

촛불혁명 목표가 분단체제 극복?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문 대통령이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고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라고 자칭했다는 사실이다. 2016년 말 거국적 촛불시위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낸 건 맞지만 문 대통령은 혁명 아닌 헌정질서에 따라 선출됐다. 문재인 정부는 혁명정부가 아닌 것이다.

이 지당한 사실을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좌파의 거두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촛불)혁명의 목표는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라고 작년 말 한 신문 기고에서 밝혔기 때문이다(‘촛불혁명’이라는 화두).

2017년 5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동아일보DB
2017년 5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동아일보DB

그는 “혁명의 목표가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면 반혁명 세력의 반격에는 막강한 외국 세력이 동참하게 마련”이라며 선거법과 공수처법에 반대한 우파 야당과 검찰은 물론, 미국과 일본까지 싸잡아 비난했다.

“볼셰비키혁명과 촛불혁명은 유사”

촛불시위를 주도했다고 자처하는 1000여개 좌파운동단체들의 연합체가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이다. 백낙청도 어딘가에 속해있다. 이들이 혁명을 통해 체제를 바꾸려 들었고, 그 혁명의 목표가 분단체제 극복(또는 남북평화공동체 구축)이라는 걸 나는 이제야 알았다. 설마하며 의심했던 것이 마침내 확인된 거다.

단언컨대, 촛불을 들고 나왔던 시민 모두가 이들과 같은 목표는 아니었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지적한 대로 ‘대한민국은 공중 납치된 항공기’이고, 기장이 납치범으로 바뀐 것조차 승객들은 모르고 있는 형국이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가 주최한 거리 시위. 동아일보DB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가 주최한 거리 시위. 동아일보DB

“러시아혁명에서 어떻게 볼셰비키가 혁명권력의 주체가 됐는지 전개과정을 보면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촛불혁명’과 큰 유사성을 보이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역사를 전공한 이인호는 다른 때도 아닌 김대중 정부 때 러시아대사를 지냈다. 그가 “마르크스-레닌주의 의식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민족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권력을 장악한 후 평화와 민족통일이라는 구실 아래 기존의 자유민주적 정치체제를 뒤엎기 시작한 듯하다”고 지난해 6월 안민포럼 세미나에서 지적한 것이 맞았던 것이다.

촛불혁명권력의 독재화는 더 흉폭

레닌은 노동자 대중이 의식화돼 자발적으로 혁명에 나서는 게 아니라고 했다. 직업적으로 혁명에 매진하는 소수의 전위부대가 혁명을 주도하면서 대중을 책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도로 결속된 소수의 조직이 상황을 주도했고, 촛불정부가 혁명 권력을 자처하며 집권했다는 점에서 볼셰비키와 다르지 않다고 이인호는 갈파를 했다.

권력 장악 뒤 볼셰비키는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쟁세력을 무자비하게 섬멸하고 역사를 왜곡해 정치도구로 쓰는 식의 거짓과 선전선동으로 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발 현 정부가 여기까지 유사하지 않기 바란다.

이인호는 당시 “촛불혁명주도세력의 목표와 대중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 사이에는 러시아혁명보다 더 큰 간극이 있어 혁명권력의 독재화는 더 빠르고 흉폭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위헌적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위법적으로 몰아붙인 그들이 또 어떤 확실한 변화를 일으킬지 두렵다.

그래도 새해인데 첫 도발을 절망적으로 끝낼 수 없어 문명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란트가 쓴 ‘역사의 교훈’을 들여다봤다(희망찬 ‘역사의 교훈’을 찾는다면Ⅱ로 이어집니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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