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방식 따른 ‘세계 유일’ 측우기, 보물서 국보로 승격된다

  • 뉴시스
  • 입력 2019년 12월 30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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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의 강수량 측정기구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금영 측우기’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를 비롯해 조선시대 측우제도를 계통적으로 증명해주는 2점의 측우대인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 등 3점을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고 30일 밝혔다.

보물 지정 당시 명칭은 각각 ‘금영 측우기’, ‘대구 선화당 측우대’, ‘창덕궁 측우대’였지만 원소재의 정확한 표기를 위해 명칭도 각각 ‘공주감영 측우기’, ‘대구감영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로 변경하기로 했다. 1971년(측우기)과 1985년(측우대) 두 번에 걸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이들 3점은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농업에 활용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한 이후 그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특히 측우기의 경우 세계 기상학계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하고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평가받은 바 있다.

서양에서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 과학자 베네데토 카스텔리에 의해 처음 언급됐지만 제작되지 못했고 이후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에 의해 1662년에 만들어진 것이 최초의 서양식 우량계다. 이는 우리나라보다 220년이 늦은 시기다.

이런 가운데 금영 측우기의 경우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어져 조선시대 충남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에 설치된 측우기로 1911년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Nature)’지(誌)에 처음 소개돼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측우기로 보고됐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이견이 없는 상태다.

금영 측우기는 1915년께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가 국외로 반출한 뒤 1971년 일본에서 환수돼 서울 기상청이 보관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금영 측우기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23년(1441년) 8월 18일자 기록에 따르면 서운관(書雲觀·기상관측 기관)에 대(臺)를 설치해 강우량을 측정했지만 이듬해 5월 8일 측정방식이 미진해 다시 원칙을 세웠으며 이때의 원칙대로 만들어진 것이 금영 측우기다.

높이는 1자(尺) 5치(寸), 지름 7치, 무게 11근으로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1.9㎝, 지름 14.9㎝, 무게는 6.2㎏에 해당한다.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또 바닥면의 명문을 통해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명문은 15세기 세종대 강우량 측정제도가 19세기까지 계승돼 원칙에 맞게 꾸준히 유지된 점을 보여준다. 형체 역시 운반하기 편하도록 상·중·하단 총 3개의 금속기로 구성해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했고 접합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도록 하는 등 정교하게 제작됐다.

또 높이가 주척(周尺)을 기준으로 1자 5치(1척 5촌)의 근사치에 해당하고 각 단은 약 5치의 크기로 만들어져 몸체 자체가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점 등도 문화재청 조사 결과 밝혀졌다.

대구 선화당 측우대는 영조 대에 새롭게 확립된 측우대 제작을 증명해 주는 유물이다. 세종 때 확립된 측우기 제도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770년(영조 46년)에 다시 부활해 영조가 세종 당시의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제작해 팔도감영에 보내고 측우대는 세종 때의 척도를 고증한 포백척(布帛尺·조선 후기에 주로 사용한 도량형 척도)을 따라 설치하도록 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전후면에 ‘측우대(測雨臺)’라고 새기고 ‘건륭 경인년(1770년) 5월에 만듦(乾隆庚寅五月造)’이라는 제작시기가 새겨져 있다. 크기는 상면 길이와 폭이 36.7×37.0㎝, 높이 46㎝, 윗면 가운데 구멍은 지름이 15.5㎝다. 측우대 규격을 공식화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준다는 점에서 역사·학술면에서 가치가 크다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창덕궁 측우대는 1782년(정조 6)에 제작된 것으로 측우대 제도가 정조 연간(1776∼1800)에도 이어졌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함께 있었던 측우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시대 강수량 제도의 역사를 설명해놓은 긴 명문과 ‘동궐도(東闕圖)’ 등의 회화자료를 통해 창덕궁 이문원(?文院) 앞에 놓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이들 3점은 30일간의 예고 기간과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등을 거쳐 국보로 지정될 예정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제작시기와 연원이 명확할 뿐 아니라 농업을 위한 과학적 발명과 그 구체적인 실행을 증명해주는 유물로서 인류문화사의 관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며 “금영 측우기는 1837년에 제작됐으나 실물의 크기가 세종 대 측우기 제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두 점의 측우대 역시 규격과 명문을 통해 그 계통을 따랐음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이어 “세계과학계에서도 인정한 현존 유일의 측우기와 더불어 측량의 역사를 증명하는 두 점의 측우대를 함께 국보로 지정해 우리나라 전통과학의 우수성과 그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릴 필요성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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