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기업 길들이기 수단 악용 우려”… 내년 3월 주총 첫 시험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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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지침’ 의결
사회적 물의 기업오너 ‘해임 표적’… 주주권 행사 소요기간 대폭 단축
이사해임-정관변경 등 기업 압박… 국민연금 경영개입 수위 높아질듯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이 27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기금위는 불법 행위로 기업 가치를 훼손했다고 판단한 기업들에 대해 법원 판결에 상관없이 이사 해임 등을 건의할 수 있도록 하는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의결했다. 뉴시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이 27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기금위는 불법 행위로 기업 가치를 훼손했다고 판단한 기업들에 대해 법원 판결에 상관없이 이사 해임 등을 건의할 수 있도록 하는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의결했다. 뉴시스
국민연금이 투자 기업의 이사 해임이나 정관 변경 등을 요구할 수 있는 카드를 손에 쥐면서 당장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 시즌 때 국민연금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오너나 임원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거나 당국의 수사 대상에 오른 기업들이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의 첫 표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이사 해임 요구 등 경영 개입 속도 낸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27일 의결한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은 그간 경영계나 시민단체에서 나온 요구사항을 일부 수용해 보완한 것이다.

우선 시민단체 측 의견을 반영해 필요할 경우 주주권 행사에 걸리는 시간을 대폭 단축하기로 했다. 지금은 기업의 개선 여지를 들여다보는 기간(수탁자책임활동 기간)이 1년으로 돼 있는데 앞으로는 이 기간이 줄어들 수 있다. 해당 기업이 대화를 거부하거나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기금위 의결을 거쳐 바로 주주권 행사 등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했다.

기업의 위법 행위에 대해 법원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주주권 행사에 나서기로 한 것도 기업들에 상당한 압박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업에 대한) 재판이 2심인지 3심인지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관심 사항도 아니고 고려할 사항도 아니다”라고 했다. 죄가 확정되지 않아도 경영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경영계의 우려를 고려해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주주권 행사 수위를 다소 조절했다. 기금운용본부의 정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에서 점수가 하락한 기업은 기존의 ‘예상하지 못한 우려 사안’이 아닌 ‘중점관리사안’으로 분류하기로 했다. 중점관리사안으로 분류되면 비교적 여러 단계의 주주권 행사 과정을 거치게 돼 기업들에 대응할 시간을 더 줄 수 있다. 박 장관은 “주주 활동의 목적은 장기 수익 및 주주가치 제고라는 점을 명확히 규정했다”며 “불필요한 경영 간섭이 아니라 기업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 재계 “기업 길들이기” 일제히 반발

전문가들은 이번 가이드라인으로 국민연금의 기업들에 대한 경영권 개입 수위가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본다. 올해 10월 기준 국민연금이 국내 상장사 중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302개사,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99개사에 이른다.


최대 주주가 아니더라도 국민연금이 주총 안건을 건의하면 그 파워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방향을 미리 정하면 기관투자가나 소액 주주들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실제 안건 통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올해 3월에도 대한항공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반대로 조양호 당시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았다. 금융계에서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타깃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효성그룹, 대림산업이 거론된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자산운용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다른 기관투자가들의 결정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며 “지분이 낮아도 국민연금이 움직이면 더 강력한 파워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경영계는 “국민연금이 정부의 ‘기업 길들이기’ 수단으로 활용될 소지가 매우 높다”며 일제히 반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실물경제가 부진한 상황인 데다 국가적 시급성이 없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복지부가 무리하게 가이드라인 도입 의결을 강행했다”며 “극히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정부 영향력하에 있는 국민연금이 기업경영의 간섭을 확대하면 결국 연금사회주의 논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자현 zion37@donga.com·허동준 / 세종=최혜령 기자
#국민연금#경영개입#주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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