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이제 어떻게 해야 돼?”[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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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떠난 ‘한강의 기적’ 디자이너가 한국 경제에 던진 마지막 질문들

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인플레 파이터’로 명성을 떨친 폴 볼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인덱스펀드’를 창시한 존 보글 뱅가드그룹 창업자, 1980년대 파산 직전 크라이슬러를 살려낸 리 아이아코카 전 회장,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

미 경제 전문매체 블룸버그뉴스는 최근 ‘2019년 우리가 잃어버린 인물들’ 특집기사를 통해 올해 세상을 떠난 111명의 세계적 인물을 꼽았다. 고인들 중 4월 별세한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 12월 타계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구자경 전 LG그룹 명예회장 등 한국 기업인도 포함됐다. 한국에서는 기업인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편이지만 해외에서 대접은 꽤 다르다. 공적도, 잘못도 있지만 가난한 나라 한국을 일으켜 세운 기업인들의 큰 족적을 그들은 기억한다.

올해 우리 곁을 떠난 ‘한강의 기적’ 세대는 또 있다. 5월 별세한 오원철 전 대통령경제 제2수석비서관이다. 고인은 1960, 70년대 한국 경제 재건과 중화학공업의 기틀을 다진 ‘한강의 기적’ 디자이너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나라의 보물’이라는 뜻에서 ‘오 국보(國寶)’라고 불렀다고 한다.

3년 전 오 전 수석과의 인터뷰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는 “그럼 어떻게 해야 돼?”를 끊임없이 물었다. 잠시라도 어물거리면 “어휴, 그것도 모르면서 뭘 하겠다는 거야”라고 호통을 쳤다. ‘왜’와 ‘어떻게’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독특한 대화 습관에 이유가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그는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이 요구하는 답을 늘 갖고 있어야 했다. ‘왜’, ‘어떻게’를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울 때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 10시간 넘게 고민하고 공부하면서 무엇을 육성해야 하는지 연도별로 쭉 정리했다”고 말했다.

팽팽 돌아가는 요즘 세상에 1960, 70년대식 장기 계획이 의미가 있을까.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계획 없이 나가다간 팡팡 나가떨어진다”고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50년 뒤를 누가 아느냐. 정부가 됐든 민간이 됐든 5년 단위로 쪼개서 열 개로 보는 거야. 큰 방향을 세워놓고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고쳐 가면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한국을 먹여 살릴 ‘인재’ 걱정을 했다. 오 전 수석은 “기능인, 기술인을 우대하는 문화가 사라지니 우리 공업이 이렇게 떨어졌다. 학생들이 다들 법대 의대 가겠다는 말이 나오게 계획을 세우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경제 참모들은 지금 있는 사람들이 죽고 다음에 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 것까지 내다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날 그의 손엔 ‘원본 소장자 오원철’이라고 적힌 낡은 책자가 들려 있었다. 1970년대 작성된 ‘기능공 5만 명 인력 양성계획’이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신화는 거저 만들어지지 않았고, 자신의 말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듯했다.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이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라. 중국이나 우리나 서로 잘하는 게 있다. 시기하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당부했다.

경제 건설은 ‘집짓기’와 같다고 하던 오 전 수석은 그날 1∼5차까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 시기와 사업 내용을 손으로 직접 쓰고 그린 진도표를 보여줬다. 5차 계획은 정밀화학, 반도체, 중화학공업, 해양플랜트 등 요즘 한국을 먹여 살리는 기간산업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나머지 백지를 채워 후손들에게 돌려주는 건 ‘한강의 기적’ 세대에 큰 빚을 진 후대의 몫이다. 우리는 그 빚을 제대로 갚고 있긴 한 건가.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폴 볼커#오원철#경제#한강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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