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철저한 오마주…뮤지컬 ‘영웅본색’

  • 뉴시스
  • 입력 2019년 12월 24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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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용범 연출·이성준 작곡가 콤비 신작
뮤지컬서 보기 드문 중장년 남성 관객 풍경
내년 3월22일까지 한전아트센터

“캬~!” 선글라스를 낀 ‘마크’가 불붙은 위조지폐로 담배에 불을 붙일 때, 객석 한편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왕용범 연출·이성준 작곡가 콤비의 국산 신작 창작 뮤지컬 ‘영웅본색’은 이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동명 영화에 대한 오마주다.

암흑가의 거물이었던 ‘송자호’(룽티·狄?)가 동생이자 경찰인 ‘송자걸’(장궈룽·張國榮)의 수갑을 뺏어 자신의 손목에 채운 뒤 경찰들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 등 영화 속 명장면들이 무대 위에서 재현된다. “우린 가는 길이 달라” 같은 명대사도 똑같이 옮겨진다. 왕 연출은 ‘영웅본색’의 마니아로 알려졌다.

뮤지컬은 홍콩누아르 장르의 시발점으로 평가 받는 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 1편(1986)과 2편(1987)을 영리하게 섞었다. 영화 ‘영웅본색’ 1편은 조직의 부하인 ‘아성’에게 배신을 당해 감옥살이를 하는 자호, 자호의 복수를 하다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된 마크, 형과 달리 경찰이 된 자호의 동생 자걸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다룬다.

뮤지컬은 1편을 큰 줄기로 삼았다. 여기에 영화 2편에서 아걸의 비밀 임무 편이 녹아들어간다. 영화 1편에서 자걸의 여자친구이자 2편의 아내인 ‘재키’ 역은 사라진다.

대신 영화 2편에서 아걸이 잠입을 위해 접근한 여성으로 조연에 가까웠던 ‘페기’가 뮤지컬에서는 주역 중 한 명으로 부상한다. 뮤지컬은 자호와 자걸이 함께 수갑을 나눠 차고 경찰들에게 다가가는 영화 1편의 마지막 장면으로 끝낸다.

뮤지컬은 시각적 향수와 함께 청각적 향수도 동시에 불러 일으킨다. 특히 영화 속에서 내내 울려 퍼지는 장궈룽의 노래 ‘당년정(當年情)’, 즉 ‘러브 오브 더 패스트(Love Of The Past)’가 메인 넘버가 됐다. 과거에 대한 향수가 뭉근하게 배어 있는 곡으로, 뮤지컬에서는 한국말 가사가 붙여졌다. 이 밖에 ‘사수류년(似水流年)’ 등 장궈룽이 부른 곡들도 뮤지컬 넘버로 포함됐다.

창작 넘버 중에서는 단번에 귓가를 사로잡는 곡이 부족하지만 마크 역의 난무하는 고음은 이성준표 넘버의 감정 카타르시스를 들려준다.

무엇보다 ‘영웅본색’은 뮤지컬 관객 다양화에 기여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객석에는 중장년 남성 관객층이 꽤 눈에 띈다.

자호 역의 유준상·임태경·민우혁, 자걸 역에 한지상·박영수·이장우, 마크 역에 최대철·박민성 등 뮤지컬 스타들이 대거 나와 기존의 주된 관객층인 20~30대 여성 비율이 여전히 높긴 하다. 하지만 중년 남성끼리 온 관객들이 상당수인 점은 국내 뮤지컬 시장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다. 영화 원작에 대한 인지도, 연말 문화 회식과 맞물린 현상으로 보인다.

24일 현재 인터파크티켓에서 ‘영웅본색’ 예매율은 남자 15.2%, 여성 84.8%다. 연령대별로 따지면 30대 31%, 40대 24.3%, 50대 7.9%로 비교적 30대 이상의 예매 비율이 높았다.

날씨가 추워져서인지 영화에서 마크를 연기한 저우룬파(周潤發)처럼 트렌치코트를 입고 성냥개비를 입에 문 채 포토존 기념촬영을 하는 관객은 보이지 않았다. 굿즈 상품으로 성냥을 파는 모습은 반가웠다.

물론 젊은 세대에게 호소하는 지점도 있다. 1000장이 넘는 LED 패널로 구현한, 현실감 같은 영상이 그 중 하나다. 패널을 다양한 층으로 나눠 사용하는 등 공간감을 극대화해 홍콩에 와 있는 같은 착시를 불러 일으킨다.

결국 뮤지컬 ‘영웅본색’은 홍콩 누아르 감성이라는 영화의 분위기를 무대 위에서 최대한 구현하려고 한다. ‘무비(movie)’와 뮤지컬의 합성어인 ‘무비컬’의 공식이 꼭 영화를 재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대 어법으로 새롭게 만들어 원작에 대해 충분한 경의를 표하거나 새로운 해석으로 환기를 시킬 수 있다. 하지만 철저하게 원작의 정서에 복무하는 작품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영웅본색’은 보여준다. 커튼콜에서 우위썬 감독의 전매특허인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장면이 스크린에서 재현될 때, 안식이 찾아온다.

홍콩에 발을 디딘 것처럼 공간감의 향수 사이로 이따금 영화와 장궈룽이 빚어낸 감성적 선율이 무대 위를 떠나닐 때, 영화의 아련한 순간들이 무대 위에 잡힐 듯 그려진다. 영화를 무대에서 체험하는 순간이다.

흥행작 ‘프랑켄슈타인’, ‘벤허’ 등을 합작한 콤비인 왕 연출과 이 작곡가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창작 뮤지컬의 역사를 기록해나가게 됐다.

다만 무대를 깊숙하게 사용하다 보니 객석 위치에 따라 배우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오페라글라스를 준비하면 더 나은 관람이 될 듯하다. 내년 3월22일까지 한전아트센터.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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