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타인에게 ‘간접 피해’ 끼친다[현장에서/위은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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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은지 정책사회부 기자
위은지 정책사회부 기자
서울에 사는 직장인 박모 씨(27)는 1년 전 친구들과의 송년회 중 봉변을 당했다. 식당 화장실에서 마주친 한 청년 탓이다. 만취한 청년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혼잣말로 욕설을 하고 있었다. 박 씨는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며 청년을 부축했다. 그런데 청년은 오히려 박 씨에게 욕설을 하며 다리를 수차례 걷어찼다. 박 씨는 결국 경찰에 신고했다. 그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기분이 상했다”며 “그날 이후 만취한 사람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흡연만 간접 폐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성인 3명 중 1명은 박 씨처럼 술에 취한 타인으로 인해 크고 작은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질병관리본부와 인제대 연구팀이 2017년 성인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우리나라 국민의 음주행태 심층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응답자의 33.7%는 간접음주 폐해로 꼽힌 12개 항목 중 1개 이상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알지도 못하는 술 취한 사람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적 있다’는 응답이 전체의 17.1%로 가장 많았다. 자신을 밀치거나 잡아 흔드는 등 불쾌한 신체 접촉을 경험한 사람(14.5%)도 많았다. 옷이나 소지품을 버렸다(9.0%)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친구, 동료 등 아는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본 경우도 많다. 회식처럼 여러 사람이 있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불쾌한 이야기를 듣거나(14.3%), 지인이 모는 음주운전 차량에 어쩔 수 없이 동승한 경우(9.4%) 등이다. 직장인 김모 씨(28·여)도 최근 업무 때문에 알게 된 사람들과 송년회 중 “예쁜 여자일수록 성추행당하기 쉬우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김 씨는 “당시 여자는 나뿐이었는데 너무 당황해서 반박하지도 못했다”며 “평소에는 성차별적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던 사람들이 술만 마시면 그런 발언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이 간접음주 폐해를 경험한 비율은 호주(70%)나 북유럽 국가(28∼53%) 등에 비해 낮은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실제와 달리 음주에 대한 사회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이번 보고서를 낸 인제대 보건대학원 연구진은 “한국 사람들은 음주에 관대하다. 다른 국가에서 문제라고 인식될 정도의 희롱이나 말다툼을 폐해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재미’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송년회와 신년회 등 각종 술자리가 잦은 시즌이다. 적당한 음주는 모임의 분위기를 돋우지만 과한 음주는 가까운 동료나 이름도 모르는 타인에게 잊을 수 없는 괴로움을 줄 수 있다.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주변 사람을 위해서라도 술을 덜 마시는 연말이었으면 한다.

위은지 정책사회부 기자 wizi@donga.com
#음주운전#간접음주 폐해#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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