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에 빠진 기러기 아빠[카버의 한국 블로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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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아이들이 나를 기러기 아빠로 한국에 남겨 두고 영국으로 유학 간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외로움을 많이 느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적응한 것 같다. 애들도 잘 적응하고 있는 듯하다. 새벽에 내 ‘꿀잠’을 방해하는 숙제를 도와 달라는 긴급 요청과 아빠가 보고 싶다는 카카오톡 횟수가 줄어든 것을 보니 말이다. 애들과 비슷한 나이에 기숙사 학교를 다녔던 나는 의무적으로 부모님께 매주 편지 한 통을 써야 했고 통화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해야 했다. 아이들이 효도하는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매주 애들로부터 영상전화를 받고 있으며 문자도 주고받는다. 기술 덕분에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영국이 옆집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내가 어학연수로 중국에 갔을 때 엄마가 나의 드문 편지를 기다리는 것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하루는 아이들이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어떻게 연락하고 지내는지 궁금해 물어봤다. 딸은 주로 카톡 단체방과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친구 소식을 듣고 있었다. 아들은 나에겐 보다 생소한 방식인 ‘리그 오브 레전드(LoL)’라는 e스포츠 게임으로 연락한다고 했다. 9시간의 시차와 여성가족부가 제시한 청소년 게임 접속 가능 제한시간에도 불구하고 시간만 나면 한국에 있는 절친과 게임을 한단다.

영국 가기 전에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혼나던 아들이 이제 친구를 핑계로 게임을 더 많이 한다는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좀 신기했다. 물론 영국에 가기 전에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LoL 월드 챕피언십’(롤드컵)을 관람했고 TV에서 LoL 리그 생방송도 많이 봤다. 영국에 간 후 그런 습관이 없어졌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밤잠을 설치며 영국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축구 경기를 보듯, 아들은 늦잠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주 LoL 경기를 본다고 했다. 케이팝 때문에 전 세계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긴 걸로 알고 있었는데 밀레니얼 세대에게 e스포츠도 케이팝 정도의 인기를 끌 만큼 유행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몰랐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총괄하는 서울글로벌센터 주변에서 가끔 게임 캐릭터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알고 보니 우리 센터 맞은편 건물의 LoL 전용 경기장 ‘롤파크’에 가는 방문객들이었다. 올해 상반기에만 해외 방문객 몇천 명이 다녀갔는데 이제 곧 두 명이 추가될 예정이다. 나와 우리 아들 말이다. 아들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이런 곳이 있다고 알려주니 다음 방학에 한국에 오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e스포츠 선수 ‘페이커’의 경기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그곳을 방문하는 것은 내 버킷리스트에 없었지만 센터에서 서울의 외국인 거주자들을 위해 문화 체험으로 롤파크 방문 기회를 마련했을 때 인기가 엄청 많았던 걸 보면 ‘내가 이제 고루한가 보다’ 하는 생각은 들었다. 아빠로서의 역할은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애들의 관심사에 흥미를 갖는 것도 있다. 다소 무뚝뚝해지는 10대 아들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다행이다.

e스포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방문 전에 좀 알고 가는 게 좋을 듯해서 관련 방송을 봤다. 한두 번 보는 것으로는 e스포츠 경기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K리그 마지막 세 경기를 온라인 방송으로 봤던 10여만 명, 야구 결승전을 시청했던 100만 명보다도 훨씬 많은 292만 명이 올해 진행된 LCK 결승전을 동시 시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또 한 번 내가 유행에 뒤처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경기는 영국에 있는 아들도 봤는데 영국 인터넷의 불규칙적인 신호 때문에 계속 버퍼링해 가며 답답하게 시청했다고 한다. e스포츠가 한국에서 세계로 뻗어가는 차세대 유행이 되기에는 각 나라의 인터넷 인프라가 장애가 되지 않을까 싶다.

10년 전 같이 게임을 했을 때 내가 일부러 져줘야만 승리했던 아들은 이제는 청출어람이다. 아들이 컴퓨터를 너무 많이 한다고 걱정했던 이 기러기 아빠는 이제 ‘매트릭스’로의 접속이 필요하게 됐다. 독자 여러분께 다음 달 신문에서 내 글이 나타나지 않으면 꼭 나를 구하기 위해 키아누 리브스를 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매트릭스#e스포츠#l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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