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배고프다고 하네[포도나무 아래서]〈42〉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눈이 오고 다음 날 물이 얼었다. 땅도 얼었다. 12월이다. 이제 땅은 인간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로소 농부도 일에서 풀려났다. 아이고 겨울 아저씨, 감사합니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쉬지 않고 돌아가던 밭일에서 벗어나 따뜻한 아랫목에서 뒹굴며 게으름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럴 처지가 아니다. 농사일에서 놓여나니 그동안 미루었던 양조장 일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일인 사과 착즙을 시작해야 한다. 착즙기를 점검하고 발효탱크를 소독해야 한다. 그전에 장작도 좀 패야 한다.

깊은 잠에 빠진 로제와인 병을 흔들어 깨우는 일도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 지난여름 작업한 로제는 병 속에서 발효를 계속해 찌꺼기가 가득 내려앉아 있다. 딱딱한 찌꺼기를 잘게 부수어 뽑아내야 와인 빛깔이 곱고 맛도 향긋하다. 한 병 한 병 찌꺼기의 상태를 체크하고 돌리고 흔들기 시작한다. 돌리고 흔들고 보고, 돌리고 흔들고 보고 또 흔든다. “신선한 내추럴 로제 스파클링을 위해서라면 내 팔이 떨어져도 상관없어”라고 시작했지만 100번째 병을 흔들 때면 온몸에 쥐가 나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아, 찬바람 좀 쐬야겠어!”

어느 순간 레돔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큰 숨을 들이쉰다. 그의 휴식 시간은 양조장 뒷길을 걸어가며 나무들을 살펴보고 이웃 밭들을 보는 것이다. 콩 농사를 지었던 밭과 고추 농사를 지었던 밭, 들깨농사를 지었던 밭들이 모두 비어 있다.

“땅들이 배고프다고 말하네.”

그는 작물이 뽑혀 나간 빈 땅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땅도 배가 고파? 땅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땅의 말도 들어? 바람의 말도 듣겠네.” 나의 반응에 그는 프랑스에서 있었던 실험을 이야기해준다. 식물이 다른 식물과 교신을 주고받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숲속 전나무에게 붉은 설탕을 섭취하게 했는데 똑같은 성분이 근처 밀밭 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들장미 담장이 있는 곳에서는 이런 교환이 더욱 잘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러니까 전나무와 밀이 들장미 우체국을 거치면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식물들은 땅속에 뿌리를 길게 뻗어 수많은 박테리아와 작은 버섯들을 활용해 저 멀리 다른 나무들과 물물교환도 하고 사연도 주고받는다. 인간은 이런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라지만 실제로 인간의 언어가 있기 그 이전 태곳적부터 식물들은 땅속에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런 콩밭은 겨울에 밀이나 보리를 뿌려주면 좋아. 한 가지 작물을 심는 것보다 여러 작물을 심어주면 땅이 훨씬 더 건강해져. 다른 종류의 풀들을 심으면 뿌리의 길이나 볼륨이 다르기 때문에 붙어사는 박테리아나 지렁이도 종류가 달라져서 땅이 보슬보슬 숨구멍이 생겨서 좋아. 뿌리의 길이가 다르니까 물을 빨아들이는 방식도 달라져서 건조기나 장마에 활용할 수 있어. 식물들도 여러 종류가 어울려 살 때 훨씬 더 행복해.”

이런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를 막을 수가 없다. 바람이 불어 콧물이 주르르 흐르는데도 남의 빈 콩밭에 쪼그리고 앉아 이야기가 끝이 없다. 농부란 직업이 나무를 키우는 것인지 땅을 키우는 것인지 모르겠다. 농사지으면 공부 같은 건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주경야독 공부가 끝이 없다.

“땅도 인간이랑 다를 것이 없어. 우리도 여러 가지 음식과 과일을 다양하게 섭취할 때 건강이 더 좋아지잖아. 실제로 소에게도 그런 실험을 했대. 한 가지 사료만 먹은 소와 50여 가지의 다른 풀이 자라는 들판의 풀을 뜯은 소의 우유를 비교했는데 여러 가지 풀을 먹은 소의 우유의 양이 50%가 더 많고 영양분도 훨씬 좋게 나왔어.”

빈 땅 이야기에 빠지면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나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아이쿠, 벌써 밤이 오고 있잖아. 빨리 들어가서 로제와인을 흔들어 깨워야지!”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