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횡설수설/정연욱]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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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0년 로마의 카이사르는 지금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장군으로 돌아오려 했다. 그는 성대한 개선식도 하고, 집정관도 되고 싶었다. 하지만 로마에서 개선식을 하려면 사령관직을 유지해야 하고, 집정관에 출마하려면 사령관직을 그만둬야 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것.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개선식과 집정관 출마를 모두 허용하는 ‘특혜’를 요청했지만 소신파 정치인으로 유명했던 마르쿠스 카토는 밤늦도록 이어진 긴 연설로 그 안건을 부결시켰다. 결국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 출마를 택했다. 2000년 전에도 견제와 균형을 추구한 정치적 지혜가 놀랍다.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은 소수파 야당이 다수파의 의회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허용된 제도다. 정치적으로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 전술이다. 미국 상원에선 반대하는 법안 등 지정된 안건이나 의제와 상관없는 발언을 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소설을 낭독하거나 심하면 전화번호부를 줄줄 읽기도 했다. 단상에서 오래 버티는 체력전이 중요하기 때문인지 필리버스터는 ‘마라톤 토크’라고 불린다.

▷우리나라에선 제헌의회 때 필리버스터가 도입됐다가 1973년 폐지됐으나 2012년 국회법 개정으로 부활했다. 우리 국회의 필리버스터도 무제한 토론을 허용하지만 의제를 벗어난 발언은 금지된다. 지정된 주제를 벗어난 발언을 하면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체력도 그렇지만 법안에 대한 이해도 중요한 것이다.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자유한국당이 본회의에 상정된 199개 안건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기습 신청하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민생법안을 볼모로 잡는다”며 본회의 개의를 거부했다.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한국당은 원 포인트 국회를 열어 어린이 교통안전 관련 ‘민식이법’ 등을 우선 처리하자고 제의했으나 민주당은 필리버스터 자체를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실 당초 한국당이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안건에는 민식이법과 데이터 3법 등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한국당이 일부러 이들 법안을 제외시킨 게 아니라 본회의 전날까지 안건으로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카드는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선거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의 본회의 상정을 막기 위한 선제적 조치다. 여당은 지금 필리버스터를 허용하면 신속처리안건 처리가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고 있고, 한국당은 여당이 선거법을 강행 처리할 거라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해 민생법안을 처리하는 원 포인트 국회라도 먼저 여는 게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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