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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몰아내자” 비밀청년회 ‘결사보국’ 혈서 남기고 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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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몰아내자” 비밀청년회 ‘결사보국’ 혈서 남기고 거사

울산=성동기 기자 입력 2019-11-30 03:00수정 2019-11-30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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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82화> 울산
올해 4월 병영 만세시위 재현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100년 전 시위 시작을 알렸던 것처럼 축구공을 높이 차올리려 하고 있다. 울산시 제공
“어제(4월 2일) 울산 언양면에서 소요가 있어 발포. 사상 3명.”(4월 3일 보고)

“동일(4월 4일) 울산 하상면에서 소요 발생.”(4월 5일 보고)

“어제(4월 5일) 울산 하상면 소요에서 수모자(首謀者) 압송 도중 청년들이 탈취하려고 폭행해 발포. 2명 즉사, 8명 부상.”(4월 6일 보고)


1919년 4월 초, 경남도 장관은 울산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세운동 관련 내용을 조선총독에게 이처럼 매일 보고했다. 울산 주둔 병력만으론 감당하기 어려워 부산 등 인근 지역의 군부대가 울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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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치 않은 움직임은 3월 말에 처음 포착됐다. ‘차제(때마침 주어진 기회)에 모든 면리원(면사무소 직원)들은 사직하라.’ 3월 30일 울산군청 명의로 된 격문이 각 면에 보내지면서 공포감이 확산됐다. 경남도 장관은 협박 내용이 담긴 이 격문이 발견된 사실을 보고하면서 다른 유언비어들도 무성해 울산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 보고철’)

3월 1일 서울 평양 등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져나간 만세운동이 4월로 접어들면서 소강 상태를 유지했지만 울산지역은 달랐다. 다른 지역보다 늦게 발동이 걸렸으나 그 강도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4월 2일 언양 시위를 시작으로 4월 4일과 5일 하상면 병영 시위, 4월 8일 온양면 남창 시위 등이 잇따라 펼쳐졌다. 특히 이틀간 일제 군경과 격렬하게 충돌한 병영 시위는 강압적인 통치에 분노하며 때를 기다려온 비밀결사조직인 ‘병영청년회’가 전면에 나서 이끌었다.

이경림 광복회 울산시지부장은 “3·1운동 이전 시기에 비밀청년회가 조직돼 항일 시위를 주도한 것은 드문 사례”라며 “자랑스러운 병영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재현 행사와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 천도교가 주도한 4·2 언양 시위

울산의 만세운동은 천교도 교인들이 활약한 언양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울산교구장 김교경은 천도교의 비밀 지하신문을 등사해 울산교구로 보냈다. 또 서울에서 만난 울산 교인에게 필사한 독립선언서를 쥐여주며 거사 준비를 서두를 것을 당부했다.

3월 하순 이무종 이규인 등 천도교 유지 6명은 4월 2일 언양 장날에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한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천도교회에서 밤샘 작업으로 등사해 만들었다. 거사일 이틀 전 교인 4명이 일제의 예비 검속에 붙잡히며 위기가 닥쳤지만 계획을 접지 않았다. 4월 1일 밤 이규인의 빈집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만세운동 주도자들은 4월 2일 아침 태극기를 감추고 언양 남부리 시장에 잠입했다. 때마침 하루 전 이웃한 양산군에서 수천 명이 참가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위대의 사기는 올랐다. 이날 남부리 시장에는 울산의 5개 면과 양산의 하북면에서 수많은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주도자들은 태극기를 나눠준 뒤 시장 한복판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조선인이면 만세를 부르라”는 외침에 장꾼 20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따라 불렀다. 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해 주재소로 끌고 가자 군중이 뒤쫓았다. 군경의 공포탄 발사에 투석전으로 맞섰고 일부 시위대는 순사에게 달려들어 총기를 뺏으려고 육박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실탄 사격을 퍼부었고 1명이 즉사하고 5명이 다쳤다. 48명이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울산광역시사’)


○ 항일정신으로 뭉친 병영청년회


유혈사태로 막을 내린 언양 시위의 바통을 하상면 병영리가 곧바로 이어받았다. 병영(兵營)은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이 이곳에 있었던 이유로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울산 경상좌도병영성(사적 제320호)이 현재 울산 중구에 남아 있다.

무예를 중시하는 상무(尙武)정신이 주민들 사이에 강했고,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청년들의 항일정신이 어느 곳보다 투철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청년들이 만든 비밀결사가 병영청년회였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울산 병영 만세시위 때 총탄에 희생된 4인과 옥고를 치른 22인을 모신 사당 삼일사. 왼쪽에 보이는 삼일충혼비의 비문은 울산 출신 국어학자 최현배가 지었다. 울산=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서울의 3·1운동 소식은 병영 땅에 일찍 도착했다. 서울 학교에서 유학하던 한명조와 이영호가 3월 3일 귀향해 고종 독살설과 함께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체포됐다고 알렸다. 평소 모이기만 하면 ‘언젠가 왜놈들과 한바탕하겠다’고 벼르던 병영청년회 회원들은 흥분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청년들은 3월 상순부터 일을 같이할 사람들을 모았다.

준비는 빨랐으나 병영 시위는 언양보다 이틀 늦은 4월 4일 처음 시작됐다. 병영청년회 간부이자 병영 시위 주도자였던 이문조는 ‘신동아’ 1965년 3월호 기고를 통해 시위가 늦어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 가지 웃지 못할 사건이 생겼다. 우리는 울산읍민들과 합세할 계획으로 청년들과 접선했다. 손모와 김모를 설득해 동의를 얻었고 같이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혈서까지 썼다. 그러나 겁이 나서 그랬던지, 미련해서 그랬던지 이들은 경찰서에 가서는 순사에게 ‘만세를 불러도 괜찮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래놓고는 이 녀석들이 우리에게 와서 ‘부모가 못하게 해서 안 되겠다’고 했다. 경찰이 ‘어디서 누가 만세를 부른다더냐’라고 물었던 모양이다. 울산수비대가 들이닥쳤고 우리는 피신했다.”

단독으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한 청년회 회원들은 병영 장날인 4월 4일을 의거일로 정했다. 이들은 거사의 성공을 위해 일심동체의 혈맹(血盟)이 선행돼야 한다고 다짐하며 즉석에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죽을 각오를 하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함)’이라고 혈서를 썼다. 독립선언서 200장과 태극기 500장을 준비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적힌 큰 깃발도 만들었다.


○ 이틀간 휘몰아친 병영 시위


4월 4일 아침 청년회 회원들은 태극기와 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집결 장소인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 교정으로 모여들었다. 오전 11시 40분경 높이 차올린 축구공을 신호로 주도자 중 한 명이던 양석룡이 큰 깃발을 치켜들면서 만세시위가 시작됐다. 청년회 회원들과 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들고 만세를 외치며 시가지로 향했다. 수백 명의 주민들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따라나섰다.

시위대를 보고 놀라 달아난 주재소 순사들이 울산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경찰과 수비대 병력 13명이 도착했다. 군경은 양석룡을 마구 때린 뒤 깃발을 빼앗고 14명을 체포했다. 피신한 청년회 회원들은 곽남마을에 모여 다음 거사를 준비했다.

이튿날인 5일 아침 일신학교 부근에 다시 모인 청년들은 만세를 부르며 시내에 있는 주재소를 향해 행진했다. 이번엔 이문조가 ‘대한독립만세’ 깃발을 들었다. 어제의 만세시위 소식이 알려지면서 병영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주민 수천 명이 만세 대열에 합세했다. 시위대가 지나가는 집집마다 지붕 위, 담장 위에서 만세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시위대가 주재소를 포위하고 고함을 치는 사이 수비대가 달려와 이문조를 비롯한 주도자 9명을 체포했다. 주민들은 수비대를 에워싼 채 검거자 석방을 외쳤다. 곳곳에서 육박전이 펼쳐졌고 돌이 날아다녔다. 일제 군경의 무차별 사격에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 등 4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중상을 입었다. 시위를 같이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인근 마을에 다녀온 이종근은 참상에 분노해 일본군의 총검 앞에 가슴을 헤치고 “쏠 테면 쏴 보라”며 호기롭게 맞섰다.

이날 의거로 40명이 체포됐으며 이 중 22명이 6개월에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부산과 대구형무소에 투옥됐다. 복역자 전원은 출옥한 뒤 ‘기미계’를 조직해 이 나라가 광복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할 것을 맹세했다.(‘독립운동사’)

비밀리에 희생자들을 추모해온 기미계는 광복 이후 ‘3·1봉제회’로 이름을 바꿨으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병마절도사영 객사를 수리해 만든 사당 ‘삼일사’에는 병영 의거 순국자들을 기리는 ‘삼일충혼비’가 서 있다. 일제 치하에서 한글을 지켜낸, 울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외솔 최현배는 비문에서 그들을 기리고 있다.

‘극악무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속에서 겨레의 자유정신을 세계에 선포하고자 우리 고장의 청년 용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하던 모습을 깊이 후세의 거울로 전하고자 이 충혼비를 세운다.’

울산=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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