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이 질끈 눈감아 버린 ‘트라이 미’ 순간들[하태원 기자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7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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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외교가에서 가장 많이 회자될 말을 하나 꼽자면 저는 주저 없이 이 한마디를 꼽고 싶습니다. 트라이 미(Try me)!

해당 발언자에 대한 ‘오마주’ 차원에서 그 발언내용을 원문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끝으로 한마디만 더 덧붙이면 영어로 트라이 미(Try me)라는 얘기가 있어요. 잘 아실 거예요, 무슨 의미인지. 어느 한쪽이 터무니없이 주장을 하면서 상대방을 계속 자극할 경우, ‘그래? 계속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라는 경고성 발언입니다. 유 트라이 미(You try me), 제가 그런 말을 일본에 하고 싶습니다.” (11월 24일 오후5시 45분, 지소미아 관련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브리핑 中)

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외교안보사령탑이 지소미아(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조건부 연장 결정 이후 계속되는 일본의 ‘협상내용 왜곡’(필자 주=우리 정부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에 발끈해 내뱉은 말입니다.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 개막 직전 부산에서 브리핑을 자청한 정의용 안보실장이 직접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에게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 등 방미 결과를 보고받고 있다. 정 실장은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포인트 맨’으로 문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왼쪽부터 임종석 실장, 정 실장, 문 대통령, 서 원장. 청와대 제공. 2018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에게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 등 방미 결과를 보고받고 있다. 정 실장은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포인트 맨’으로 문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왼쪽부터 임종석 실장, 정 실장, 문 대통령, 서 원장. 청와대 제공. 2018년 3월
‘트라이 미’라는 말을 제일 먼저 접했던 곳은 미국 대형마트였습니다. 워싱턴 특파원 재직시절(2008~2011년) 아이들이 어렸던 탓에 완구코너에 자주 들렀는데 상품 곳곳에 선명하게 보였던 표식들이 바로 이 문구였습니다.
미국 대형마트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어린이용 완구 선전용 문구. ‘트라이 미(try me)’는 소비자들에게 한번 눌러 보라는 권유를 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미국 대형마트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어린이용 완구 선전용 문구. ‘트라이 미(try me)’는 소비자들에게 한번 눌러 보라는 권유를 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트라이 미’라고 쓰인 곳을 눌러보거나 만져보면 예상하지 못한(물론 때로는 예상했던) 동작이 나오거나 재미난 소리(음성) 같은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해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상술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물론 이 상품이 호객에 성공하려면 창의성이나 의외성, 기상천외함 등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의용 실장이 국가이익이 걸린 중대 사안과 관련해 농담을 했을 리는 없겠죠. 정 실장의 발언은 오히려 ‘무례한’ 일본을 향한 엄중한 경고에 가까웠습니다. 정 실장의 ‘트라이 미’를 좀 거칠게 번역한다면 “어디 한번 덤벼봐.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거야”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발 더 나아간다면 ‘아베 정부가 우리를 무시하는 것 같은데. 본때를 한번 보여 주겠어’라는 전의(戰意)에 불타오르는 감정을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총을 들고 있는데 상대방이 “너 그 총 못 쏠걸. 배짱이나 있어?”라고 비아냥거릴 때 ‘트라이 미’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 덤벼봐. 난 널 쏠 거야, 제대로 보여줄게”라는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11분 가량 예정에 없던 환담을 하는 모습. 문 대통령을 수행했던 정의용 안보실장이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이다. 청와대 제공. 2019년 1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11분 가량 예정에 없던 환담을 하는 모습. 문 대통령을 수행했던 정의용 안보실장이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이다. 청와대 제공. 2019년 11월
자 이제 현실로 한번 돌아와 볼까요? 일본이 정의용 실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상대로 또 ‘트라이’를 한다면 우리는 과연 뭘 보여줄 수 있을까요? 일본이 기겁할 만한, 그리고 ‘트라이’ 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할 만한 한방이 과연 있을까요?

저도 그 무언가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 세대 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호기롭게 말했지만 여전히 고치지 못한 그 고약한 ‘버르장머리’를 단박에 고칠 수 있는 결정적 방안이….

사실 ‘트라이 미’ 상황은 정작 휴전선 이북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11일 북한은 우리 정부에 금강산에 지은 우리 시설을 철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국민들은 15일 북한 관영매체가 이 사실을 공개할 때 까지 감감무소식 이었습니다. 애써 인내하는 우리 정부에 대해 조선중앙통신은 “남조선 당국은 귀머거리 흉내에 ‘생주정’까지 한다”고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관계의 문을 닫고 군부대 방문 등 도발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황해도 남단 창린도 방어부대를 시찰하는 모습. 사진출처 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관계의 문을 닫고 군부대 방문 등 도발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황해도 남단 창린도 방어부대를 시찰하는 모습. 사진출처 노동신문

북한군의 강하훈련을 지도하는 모습. 사진출처 노동신문
북한군의 강하훈련을 지도하는 모습. 사진출처 노동신문
금강산 관광지구 해금강 호텔 앞에서 남측시설 철거를 지시하는 김 위원장. 사진출처 노동신문
금강산 관광지구 해금강 호텔 앞에서 남측시설 철거를 지시하는 김 위원장. 사진출처 노동신문


5일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낸 한-아세안 정상회의 친서(親書)내용도 대단히 모욕적인 방식으로 공개했습니다. 21일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 참석이 어렵다면 특사라도 보내달라는 간절한 청을 보내왔다”고 밝혔습니다.

결정타는 25일 밝혀진 서해 접경지역에서의 해안포 사격입니다. 9년 전 연평도 포격도발이 있었던 날(23일)을 골랐고 한-아세안 회의에 맞춰 이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지난해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부속 합의서인 ‘9·19 군사합의’를 명백히 위반한 행동입니다.

우리의 안보사령탑이 나서서 북한 김정은 정권을 향해 ‘트라이 미’라고 일갈해야 정상이 아닐까요? 북한 관영매체가 김정은의 현지지도 사실을 공개하고 나서야 마지못한 듯 국방부 대변인의 ‘유감’ 성명을 낸 것은 실망스럽습니다. 공식 전통문도 아니고 군통신선을 이용한 ‘팩스 항의문’을 보낸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입니다.

지난 8월 지소미아 종료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외교부 차관이 주한미국대사를 초치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일본의 언론에 난 총리의 발언에 발끈하고, 일개부처(경제산업성)의 ‘이른바’ 합의내용 왜곡발표‘에 “일본의 양심”까지 들먹인 게 청와대 안보와 홍보라인 아니었습니까.

반면 집요하게 이어지는 중국의 사드관련 보복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못하고 무던히 인내만 했던 것이 문재인 청와대입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을 향해서는 “유리그릇 다루듯” (문재인 대통령, 8월 19일 수석보좌관 회의 발언) 해야 한다며 ‘러브콜’ 보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서울의 한 미국 햄버거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이날 해리스 대사는 안보 관련 행사 두 건에 불참한 뒤 이 행사에 참석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에 대한 한미 간 이견을 두고 자신을 초치한 외교부 및 정부를 겨냥해 불만을 표출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사진출처 해리스 대사 트위터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서울의 한 미국 햄버거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이날 해리스 대사는 안보 관련 행사 두 건에 불참한 뒤 이 행사에 참석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에 대한 한미 간 이견을 두고 자신을 초치한 외교부 및 정부를 겨냥해 불만을 표출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사진출처 해리스 대사 트위터
이쯤 되면 남북대화 하나면 성공시키면 나머지는 ‘깽판’을 쳐도 괜찮다고 공언했던 노무현 정부와 이 정부 중 어느 쪽이 더 북한에 대한 집착이 큰 것이 궁금해집니다. 왜 그렇게 북한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워 지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안보라인의 실력에 대해 근본적인 의구심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안보는 공기와 같다’는 외교안보의 금언(金言)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 부장급(정치학 박사 수료)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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