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세와 부유함 사이[글로벌 이슈/하정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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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美상원의원
워런 美상원의원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의 서민 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건물관리인, 모친은 백화점 점원이었다. 빠듯한 살림에 한 푼이라도 보태려 13세 때부터 친척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했다. 19세에 첫 남편과 결혼했고 29세엔 두 아이를 둔 싱글맘이 됐다.

미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의 선두권에 있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70)의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그의 인생이 ‘아메리칸 드림’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세계 최고 하버드대의 파산법 교수라는 화려한 커리어, 하버드대 동료 교수인 자상하고 헌신적인 두 번째 남편, 2012년 11월 첫 선거에서 곧바로 상원의원에 뽑히고 두 번째 의원 임기 중 대권 후보 반열에 오른 순탄한 정치 역정, 1200만 달러(약 141억 원)의 재산까지…. 부족한 점을 찾을 수 없다.

상아탑의 백면서생을 백악관 코앞까지 데려다놓은 정책은 부유세(wealth tax)다. 5000만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보유한 가계에 연 2%, 순자산 10억 달러에 6%의 세금을 물려 전 국민 건강보험 정책 ‘메디케어포올’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겠다는 공약이다. 1월 대선 출사표를 낼 때만 해도 10억 달러 부자에 대한 세율을 3%로 주장했지만 최근 “예상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며 2배로 올렸다.

그는 이달 14일부터 리언 쿠퍼먼 헤지펀드 오메가 창업자, 조 리케츠 온라인 증권사 TD아메리트레이드 창업주, 로이드 블랭크파인 전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 피터 틸 페이팔 공동창업자 등 4명을 거악(巨惡)으로 규정한 1분짜리 ‘저격 광고’도 내보내고 있다. 이들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와중에도 엄청난 돈을 벌었고, 일부는 내부자 거래 등의 혐의에 직면했으며, 이들의 부는 그들만의 성과가 아니라 사회 인프라와 이들의 밑에서 일한 근로자 덕이라며 부유세 도입을 외쳤다.

지목된 이들은 “정파성만 다를 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식 ‘분열의 정치’와 뭐가 다르냐. 부자가 죄냐”며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주,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 CEO 등도 부유세 비판에 가세했다. 주류 경제학계에서도 부유세의 이중과세 및 징벌적 성격, 호화 요트·미술품·보석 등에 대한 가치평가의 어려움, 부자들의 자산 해외 이전 가능성, 사생활 침해 논란, 독일 아일랜드 등 부유세를 도입했다 폐지한 국가의 사례를 들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흥미로운 점은 워런 의원이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월가와 일종의 ‘악어와 악어새’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이다. 경제전문매체 포브스는 납세 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재산 형성 과정을 분석했다. 그가 재산의 83%인 1000만 달러를 2008∼2018년에 벌었으며 핵심 수입원이 각종 자문 및 저술료였다고 전했다.

그는 트래블러스보험, 씨티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비자카드 같은 거대 금융사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자문, 상담, 전문가 증인 등을 맡아 건당 20만 달러 내외의 보수를 받았다. 2013∼2018년에는 맥밀런 출판사로부터 320만 달러의 관련 저술 선불금도 받았다. 대형 금융사로부터 고통받는 서민과 중산층을 도왔다는 대의명분이야 있겠지만 교수치고 적지 않은 재산이 월가 관련 업무에서 나왔다는 점까지 부인할 순 없다.

꼭 부유세는 아닐지라도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 세계 각국에서 이 문제를 두고 다양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움직임의 배후에 ‘정치인 워런’의 공이 존재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다만 본인 또한 기성체제로부터 상당한 수혜를 입었으면서 자신보다 재산이 더 많은 사람들을 무조건 몰아붙이고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공감을 가져올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월가 거물의 재산이 그들의 힘만으로 일군 게 아니라면 식당 접시를 나르던 소녀가 1200만 달러 자산가가 된 것 또한 오로지 본인의 능력 덕분이라고 치부하긴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서민에겐 그의 ‘1200만 달러’나 거부의 ‘10억 달러’나 꿈꿀 수 없는 돈이긴 마찬가지다. 워런 의원이 “나는 운이 좋았지만 미래 세대에게는 이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부유세 도입 기준을 1000만 달러 이상으로 낮추고 나부터 상응하는 세금을 내겠다”고 하면 그의 진정성을 믿는 유권자들이 훨씬 많아지지 않을까.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부유세#부유함#엘리자베스 워런#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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