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확대 논쟁… 좀 멀리, 숲을 보자[동아광장/하준경]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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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재정정책 두고 갑론을박 후끈… 일부선 “후손에게 나랏빚” 비판도
‘전쟁 수준 저출산’ 직면한 한국… 과감하고 획기적인 대응 절실
경제구조 바꾼 美 사례 살펴야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최근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곳간에 작물을 쌓아두기만 하면 썩어버리기 마련”이라며 재정 확대를 주장해 화제가 됐다. 논평이 잇따랐다. 돈이 작물처럼 썩느냐는 지적도 있고, 적자재정으로 나랏빚을 늘리면 후손에게 부담이 된다는 우려도 있다.

우선 돈도 작물처럼 썩을 수 있을까. 화폐의 본질과 관련된 질문이다. 경제학자 조지프 오스트로이와 로스 스타가 제시한 비유를 보자. 어느 섬에 갑과 을이 사는데, 이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저녁식사를 차려주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이 깜빡해서 자기가 밥할 차례인데도 얻어먹을 차례라고 우긴다. 신뢰가 깨지고 거래는 끊긴다. 이럴 때는 밥을 얻어먹을 때마다 식권, 예컨대 ‘녹색 돌’을 내게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녹색 돌은 밥에 대한 권리를 보여주는 증표고, 이게 바로 돈이다. 돈은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을 보완해주는 ‘기록 저장장치(record-keeping device)’다.

저장된 기록은 썩지 않는다. 그러나 기록이 꼭 생산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모든 이가 노후 대비를 위해 녹색 돌을 모으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모두들 녹색 돌을 얻으려고 저녁을 차릴 것이다. 하지만 녹색 돌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도 돌을 쓰지 않는다면 이들이 차려놓은 저녁식사는 대부분 썩고 만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저녁 차리는 일 자체를 하지 않게 되고 경제활동은 축소된다.

즉, 기록으로서의 돈은 썩지 않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인 재화와 서비스는 지금 이 시간에도 썩고 있을 수 있다. 미용실에 가고 싶은데 돈 아낀다고 아무도 가지 않는다면 그 생산되지 않은 서비스가 저축돼 미래 자원이 될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질 뿐이고 국민소득은 그만큼 줄어든다. 실업자들의 시간은 지금 쓰지 않으면 그냥 없어진다.

이 상황에서 정부는 사람들에게 ‘녹색 돌 교환권’, 즉 국채를 안겨주고 녹색 돌을 빌려와 그것으로 사람들이 만든 저녁식사를 먹어주고 또 서비스를 사줌으로써 생산과 소득을 늘릴 수 있다. 이때 정부 지출이 늘면서 재정적자와 나랏빚은 커지지만 민간은 그만큼 수입이 늘어 흑자를 보고 국채라는 자산을 쌓게 된다. 그럼 이 작업은 후손의 부담을 늘리는 일일까. 나랏빚은 언젠가 후손이 물려받겠지만 그 빚에 대한 청구권인 국채도 후손이 물려받는다. 후손이 세금으로 이자를 부담해야 한다면 그 이자를 받는 이도 바로 그 후손이다. 당대에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국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외국 돈을 빌려 외국 물건을 사다 썼던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일본은 국가채무가 국민소득의 230%가 넘지만 국채를 일본 중앙은행과 국민들이 대부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나랏빚이 폭증할 때도 재정위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을 꼭 따라 하자는 건 아니다. 한국의 재정 확대는 경기 대응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구조 개혁을 위해 필요하다. 일본처럼 기존 틀 내에서 조금씩 움직이면 저출산, 고령화 등 근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국가채무만 는다. 미국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아 16%였던 국가채무 비율을 106%까지 올렸다. 국가위기 상황에서 불가피했겠지만, 그 돈은 빚과 실업에 시달리던 미국 청년들을 대거 제조업 중산층 노동자로 변신시키며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미국도 1930년대엔 저출산 우려가 컸으나 전쟁 후엔 베이비붐이 일었다. 이후 미국의 국가채무 비율은 점차 낮아져 1975년엔 23%까지 떨어졌다. 재정이 수십 년에 걸쳐 경제구조의 대전환을 이뤄낸 셈이다.

한국도 기존의 틀을 바꾸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합계출산율 0.98이면 전쟁 상황이다. 임대주택 공급, 돌봄체계 구축, 재교육 및 사회안전망 확충, 사교육비 절감, 공공인프라 개선, 신산업 창출, 연구개발 투자 등 구조 전환을 위해 돈쓸 일이 많다. 당장의 국가채무 비율에 연연하지 말고, 수십 년의 시계(視界)를 가지고 과감히 제대로 해야 한다. 재정건전성은 궁극적으로 납세자 수-인구와 납세능력-생산성에 달려 있다. 특히 인구는 결정적 변수다.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확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획기적 대응이 절실하다.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재정확대#정부 재정정책#국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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