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되면 2205개 처벌조항 예비 범법자 되는 셈”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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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잘못해도 대표이사 엮어 처벌… 주52시간 준수-괴롭힘 금지도 책임
CEO들 “교도소 담장 위 걷는 기분”
한경硏 “경제법령 형사처벌 항목중 83%가 법인-CEO 동반 처벌 규정”


“사장님, 주 52시간 넘게 일해 버릴까요.”

국내 한 자동차 부품회사 대표 A 씨는 직원들의 이 같은 농담에 등골이 오싹해졌다고 했다. 내년부터 주 52시간제가 300인 미만 기업에까지 확대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 52시간 위반이 적발되면 사업주(대표이사)가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A 씨는 최근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일일이 점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직원 200여 명 중 한 명이라도 근무시간을 넘기면 감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기업인은 “대표이사가 되는 순간 수천 가지 이유로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어 두려움이 생긴다”고 토로한다. 13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경제 관련 법령 285개를 전수 조사한 결과 경제 관련 형사처벌 항목(10월 말 현재)은 2657개로 20년 전인 1999년(1868개)보다 42% 증가했다. 특히 형사처벌 항목의 83%(2205개)는 범죄를 저지른 직원뿐 아니라 법인과 대표이사가 함께 처벌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형사처벌 항목 중 징역형 등 인신구속형의 비율도 89%나 됐다. 한경연 관계자는 “일단 대표이사가 되는 순간 수천 가지 형사처벌 조항에 갇히면서 예비 범법자가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올해 7월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대표적인 과잉 처벌법이란 평가가 나온다.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준 회사의 사업주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지만 정작 괴롭힘 가해자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은 없다.

직원이 실수로 공시 정보를 누락해도 대표이사까지 처벌하는 공정거래법 70조도 있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은 2016년 검찰로부터 계열사 신고 누락 혐의로 약식 기소됐다. 1,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 판단을 앞두고 있지만 실수에 의한 누락까지 기업의 대표가 기소될 수 있는 사례로 남았다. 이 재판 때문에 카카오는 증권업 진출도 막힐 수 있다. 최종심에서 유죄가 되면 금융사 대주주 적격 심사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형사처벌 위험에 외국인 CEO 한국근무 기피”

CEO 처벌조항 2205개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표이사가 모든 실무를 일일이 챙기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면 어떻게 경영활동을 하겠나”라고 했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에 따르면 하도급업체가 책임지고 있던 상황에서 하도급업체 직원이 사망해도 원청업체 대표가 ‘안전관리 소홀’로 최대 7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게 된다.

대표이사에 대한 지나친 처벌로 외국인 경영자들이 한국 근무를 기피하는 분위기도 있다. 출입국관리법 일부 규정(제99조의 3)에 따르면 국내외 항공사 대표와 한국 지사장들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승객들의 여권, 사증(VISA) 등 입국서류 확인이 미비해 문제가 생겼을 경우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한 외국계 기업의 고위 간부는 “한국에서는 직원 1만 명 중 한 명의 문제가 곧 대표이사의 책임으로 귀결된다”며 “다른 나라에 근무하다가 한국에 발령을 받은 외국인 최고경영자들은 위험 부담을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사업주에 대한 처벌 강도도 독일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사업주가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노동 관련 규정은 독일이나 일본이 대부분 1년 이하의 징역형인 데 반해 한국은 5년 이하의 징역(5건), 3년 이하의 징역(7건) 등으로 처벌 강도가 세다.

유근형 noel@donga.com·변종국·이호재 기자

#ceo#과잉처벌#주 52시간제#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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