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산티아고[횡설수설/김광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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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수도 산티아고는 불타고 있다. 대규모 시위와 무력 진압, 폭동과 약탈로 최소 20명이 사망하고 7000명 이상이 연행됐다. 원래 산티아고는 남미 주요 도시 가운데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시다. 이는 역설적으로 1973년 이후 17년간의 피노체트 군사정권 덕분이었다. 무고한 시민들도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학살되는 판에 총질을 해대는 범죄 집단들이 설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인구 1800만 명,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인 1만5000달러인 칠레. 한국이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로 와인과 홍어로 친숙하다.

▷피노체트 이후 최대의 혼란을 야기한 것은 고작 혼잡시간대 지하철 요금 30페소(약 50원) 인상이었다. 처음엔 고교생들이 주도한 지하철 무임승차 형식의 저항 운동이었으나 산티아고 인구 500만 명 가운데 20%인 100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시위가 벌어지자 후안 안드레스 폰타이네 경제장관은 “혼잡시간대 할증 요금을 내기 싫으면 더 일찍 일어나 출근하면 된다”고 해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을 달라는 군중을 향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망언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는 왕비를 미워한 군중이 퍼뜨린 소문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어쨌든 칠레 경제장관의 발언도 두고두고 회자될 게 틀림없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해당 경제장관, 그리고 시위대를 ‘범죄자’라고 지칭한 자신의 사촌인 내무장관을 포함해 핵심 장관 8명을 경질하고 지하철 요금 인상도 철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됐다. 이번 혼란으로 이달 16, 17일 산티아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세계 21개국 정상들이 모일 예정이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무산됐다. 이번 APEC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별도로 만나 1차 무역합의 서명을 하려고 한다는 뉴스로 특히 주목을 받았었다. 이제 서명 장소로 산티아고 아닌 제3의 장소가 거론되고 있다.

▷지하철 요금 인상과 망언만으로는 100만 군중의 분노를 설명하지 못한다. 밑바닥에 흐르는 근본 원인이 따로 있다. 칠레는 주변국들에 비해서는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인구 1%가 부의 33%를 차지하는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한 국가로 꼽히고 있다. 이번 시위에서 특히 청년층의 불만이 극도로 표출됐는데 청년(만 15∼24세) 실업률 19.2%가 그 이유를 말해준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칠레#산티아고#지하철 요금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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