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로 881일째 최장수 총리 기록… 차기 대선 행보에 주목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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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관심 모으는 이낙연 총리 거취

2017년 5월 31일 취임한 이낙연 국무총리(67)가 28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된다. 881일째다. 이명박 정부 당시 김황식 전 총리의 재직 기록(2010년 10월 1일∼2013년 2월 25일)을 깨는 것이다.

언론인 출신 첫 총리인 이 총리는 4선 국회의원과 전남도지사를 지내면서 줄곧 민주당 계열에 있었지만 친문 계보는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천거로 정치권에 입문한 뒤 잠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변인을 했으나 2003년 친노 그룹이 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만들 때도 합류하지 않았다. 그 후에는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오히려 가까웠다. 그런 그가 어느 정권보다 정파색과 진영 논리가 강한 문재인 정부에서 어떻게 최장수 총리 기록을 갈아 치울 수 있었을까.


○ 디테일하고 안정감 있는 언어, 이낙연의 ‘절대 반지’

이 총리에 대한 정치권의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가 책임 총리, 실세 총리를 부활시켰다는 평가에는 별로 이견이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이 총리 취임 후 몇 달까지만 해도 총리실에서 각 부처에 자료를 요구하면 “청와대에 직보하겠다”는 반응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 총리 취임 초기에는 ‘스텔스 총리’ ‘대독 총리’가 될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다 얼마 후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의 대처가 필요한 대형 사건 사고가 터진 게 계기가 됐다. 2017년 8월 류영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계란 파동, 생리대 파동 등에 대응을 제대로 못한 게 대표적이다. 이 총리는 의원 시절부터 제대로 보고하지 못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류 처장이 보고를 제대로 못하자 “관리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보다 설명의 의무를 적절히 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많은 질책을 받고 있다”고 면박을 줬다. 이 총리는 “공직자는 4대 의무(국방, 근로, 교육, 납세) 외의 ‘설명의 의무’가 있으며, 이에 충실하지 않으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2017년 8월, 차관급 인사 임명장 수여식에서)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총리가 특유의 디테일로 정부 내에서 군기반장 노릇을 하자 공직사회에서 “총리에게 보고하러 가는 게 무섭다”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총리실 관계자는 “국민들은 공무원들이 깨지는 걸 좋아한다. 그만큼 공무원들의 서비스가 달라지기 때문이다”라며 “총리가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나 간담회를 열기만 해도 변화의 징후들이 보인다”고 전했다.

이 총리가 대중적 이목을 끌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17년 국회 대정부질문이다. 야당 의원들이 총리와 장관들을 불러 혼쭐내고 정부 측에서는 “시정하겠습니다”라며 상황을 정리하는 게 통상적인 국회 대정부질문의 풍경. 그러나 이 총리는 정부 회의에서처럼 야당 의원 질의를 격식 있는 언어로 하나하나 깨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었다.

“오죽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통화를 하면서 한국이 대북 대화 구걸하는 거지같다는 그런 기사가 나왔겠냐.”(김성태 의원, 2017년 9월 대정부질문)

“의원님이 한국 대통령보다 일본 총리를 더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이 총리)

그때부터 이 총리가 국회 답변에 나설 때마다 촌철살인 화법을 모은 유튜브 동영상이 돌기 시작했다. 이전 총리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정치적 팬덤’이었다.

이렇게 이 총리가 문재인 정부의 실세 총리를 거쳐 최장수 총리 기록을 깨게 된 강력한 무기는 바로 그의 디테일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언어 구사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신문 기자로 20년간 글을 닦아 온 이 총리는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언어를 자신의 장기로 삼았다. 초선 시절 아무 인연 없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변인으로 그의 취임사까지 쓸 수 있었던 것도 쉬우면서도 격식 있는 이낙연식 정치 언어 덕이었다.

이 총리의 언어는 정치적 무기를 넘어, 어느덧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이 됐다. 특히 저음에 실려 가는 안정감 있는 언어는 소득주도성장이나 한반도 운전석론 등 문재인 정부의 진보 정책 드라이브에 불안감을 느끼는 유권자들에게 강력한 ‘보정 효과’를 준 게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 주요 인사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안정감을 언어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 이 총리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 주자로 1위를 놓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안정감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 총리도 언어의 힘을 잘 알고 있다. 평소 좋은 아이디어나 표현이 떠오르면 바지 뒷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기자 시절에 했던 것처럼 메모를 한다. 일요일 오후에는 사무실에 나와 그 주 자신의 연설 원고를 직접 쓰거나 고친다. 대변인을 오래 해서인지 틈날 때마다 입에 볼펜을 무는 식으로 또박또박 원고 읽는 연습을 한다.


○ 총리 이후 ‘달라진 이낙연’ 보여줄 수 있을까

2017년 5월 10일 오후 2시 45분경, 청와대 춘추관 뒤편 대기실. 몇 시간 전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서훈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등과 인사 발표 기자회견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오전 전남지사 공관에서 갑작스럽게 상경한 이 총리가 문 대통령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를….”

왜 별 인연도 없는 자신을 총리로 발탁했느냐는 물음이다. 문 대통령은 웃으며 “제가 예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라고 답했다.

문 대통령이 집권하면 초대 총리로 이 총리를 발탁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건 2016년 5월경이었다.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으로 대선을 1년 7개월 앞둔 시점. 문 대통령은 당시 전남지사였던 이 총리에게 “나중에 이 지사와 꼭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때만 해도 이 총리는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여겼다고 한다.

이 총리가 최장수 총리 기록을 깬 것은 무엇보다 임면권자인 문 대통령의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삶의 궤적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지금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고 한다. 한 친문 인사는 “말과 행동의 신중함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과 이 총리가 닮은 면이 많다”고 전했다. 지금도 문 대통령은 참모들이 작성한 발언 초고를 직접 읽고, 빨간색 펜으로 고친다. 이 총리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호흡은 국무회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국무회의에서 법령 개정 등이 논의되기 전 해당 부처 장관이 개정 취지 등을 설명하는데, 아무래도 공무원들이 써준 원고대로 읽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면 이 총리가 나서 ‘이 법안의 개정 이유는 무엇이고, 개정되면 일반 국민이 체감하기에 이런 점이 달라진다’며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 총리가 2인자로서의 처신법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의중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몇 차례의 개각 국면에서 이 총리는 문 대통령이 고려했던 인사에 반대 의견을 밝히기도 했고, 본인이 원하는 인사를 추천하기도 했다. 국무조정실장으로 일했던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 중 하나는 이 총리의 다음 역할이다. 내년 4월 총선 전에는 당에 돌아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다.

조국 사태 이후 민주당에서는 이 총리 역할론이 커지고 있다. 지지율이 떨어진 당 입장에서 이 총리가 내년 4월 총선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총리가 늦어도 연말에는 당내에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총리 측근들도 이 총리가 가급적 연내에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에서 내년 선거를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1위라는 간판으로 선거에 기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총리는 현역 의원 중에는 이개호 오영훈 의원 등과 가깝고 이 총리와 함께 내각에서 호흡을 맞춘 의원 출신 장관들 사이에서도 이 총리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일각에선 총리직을 내려놓고 당에 복귀하는 순간 현재 1위를 달리는 대선 지지율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총리라는 견장을 떼고 정치권에 복귀하는 순간부터 당의 대주주인 친문 진영의 견제를 받을 수도 있고, 정치 경력에 비해 자기 세력이 없는 이 총리가 지금처럼 대선 주자 위치를 유지할지도 의문이라는 것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이 총리가 당으로 돌아가는 건 기정사실이다. 문제는 ‘정치인 이낙연’이 총리 이전과 이후로 얼마나 달라졌는지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디테일하고 안정감 있는 언어를 갖춘 국정 2인자 그 이상의 정치력을 보여줘야 승부를 걸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황형준 constant25@donga.com·한상준 기자
#이낙연 총리#문재인 대통령#차기 대선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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