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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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현의 워치앤톡(Watch&Talk)]

파네라이의 대표 컬렉션인 ‘라디오미르’. 파네라이는 자체 개발한 발광물질 ‘라디오미르’를 컬렉션 이름에 그대로 붙였다.
파네라이의 대표 컬렉션인 ‘라디오미르’. 파네라이는 자체 개발한 발광물질 ‘라디오미르’를 컬렉션 이름에 그대로 붙였다.
필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생애 첫 시계는 20여 년 전 삼촌이 선물해 준 ‘돌핀 시계’였다. 시곗줄에 오렌지색 돌고래가 새겨진 돌핀 시계는 1984년 한독 시계사업부에서 만든 국내 제품으로 당시 청소년들의 ‘잇템(it item)’이었다.

디자인을 대충 살피고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이불을 뒤집어쓰는 일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주한 흐릿한 시계 화면이 이유 없이 멋져보였다. 화면 한쪽에 옅은 불빛이 들어오는 야광 기능이 없는 제품이었지만 잠들기 전 꼭 몇 번씩 버튼을 눌러 불을 밝혔다. 야광 기능이 있는 시계를 갖게 된 후에는 더욱 여러 번 이불을 뒤집어썼다. 낮에는 숨었다가 오직 어둠 속에서만 존재를 드러내는 야광은 밤하늘 별처럼 신비로웠다.

두 개의 얼굴

일반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시계는 두 개의 얼굴(다이얼)을 가지고 있다. 시곗줄(스트랩)과 시곗바늘(핸즈)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보이는 ‘낮의 얼굴’이 있고, 불이 꺼지면 서서히 나타나는 ‘밤의 얼굴’이 있다. 시계를 풀고 방 안 불빛이 모두 사라진 후에나 볼 수 있는 두 번째 얼굴은 대부분 놓치기 쉽다. 날이 어두워진 후에도 사방이 불빛으로 가득한 요즘 거리에선 더욱 밤의 얼굴을 보기 어렵다.

시계가 빛을 내는 방식은 크게 ‘축광식 루미노바(Luminova)’와 ‘트리튬(Tritium)’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건 축광 방식의 루미노바로 어둠에 놓이기 전 일정 시간 동안 빛에 노출돼야만 빛을 뿜을 수 있다. 처음에는 아주 강한 빛을 내뿜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밝기가 줄어든다. 요즘 출시되는 하이엔드 브랜드 제품에는 밝기와 지속시간이 일반 루미노바보다 훨씬 뛰어난 ‘슈퍼 루미노바’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라듐의 대체재로 등장한 방사선 소재 트리튬은 축광식 루미노바와 달리 서서히 빛을 낸다. 처음에는 발광을 하지 않다가 시나브로 빛을 뿜기 시작한다. 초기 밝기는 루미노바에 비해 떨어지지만 따로 빛을 모을 필요가 없고, 지속성이 길다는 특징이 있다.

야광 기술이 뛰어난 시계 브랜드는 군사용이나 다이버워치로 유명한 경우가 많다. 전투나 심해(深海) 잠수 등 특수 상황에선 빛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낮의 얼굴만큼이나 밤의 얼굴이 잘 알려진 이탈리아 브랜드 ‘오피치네 파네라이’는 원래 ‘군인을 위한 시계’였다. 이탈리아 왕실 소속 해군에 야간 작전용 시계를 공급했던 파네라이는 20세기 초 라듐을 기반으로 한 발광 물질 ‘라디오미르(Radiomir)’를 발명해 특허를 출원했다. 파네라이가 군에 시계를 공급하던 1930년 당시, 적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진흙이나 해초로 시계 불빛을 가려야 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파네라이의 야광 기술은 독보적이었다. 현재 파네라이의 대표 컬렉션 이름이 ‘라디오미르’인 것을 보면 야광 기술에 대한 이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다이버워치 연구 개발에 큰 공을 들이고 있는 롤렉스는 주요 제품에 자체 야광 기술인 크로마라이트 기술을 적용했다. 크로마라이트 야광 물질은 초미세 금속 산화물을 활용한 특수 물질로 8시간 이상 밝은 빛을 낸다.

롤렉스의 크로마라이트 디스플레이.
롤렉스의 크로마라이트 디스플레이.

빛 속에 감춰진 어둠

지금은 시계의 또 다른 얼굴이 됐지만 어둠 속에서 시계가 빛을 뿜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 시계에 야광도료가 발라지기 시작한 건 1898년 퀴리 부인이 우라늄의 찌꺼기에서 나온 ‘라듐’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어둠 속에서 강한 빛을 냈던 라듐은 캄캄한 밤 시간을 확인하고 싶은 당시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문제는 제작 방식이었다. 붓으로 야광도료를 숫자판(인덱스)에 발랐는데 좀 더 정교한 칠을 위해 작업자들은 항상 라듐이 묻은 붓 끝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대부분 여성들로 하루 250개의 숫자판을 칠해야 했던 일명 ‘라듐걸스’는 이후 이가 빠지고 심각한 빈혈에 시달렸다. 붓 끝에 묻어 있던 라듐이 입을 통해 골수로 침투해 빈혈과 백혈병을 일으킨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라듐을 삼켜야 했던 여공들의 죽음은 야광 기술 발전 뒤에 숨겨진 짙은 어둠이다.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퀴리 부인의 사인도 ‘라듐 방사능 중독’이었다. 지난 한 달간은 거의 매일 잠들기 전 시계의 두 번째 얼굴을 들여다봤다. 신비로운 모습에 매번 감탄하다가도 ‘라듐걸스’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렸다. 어둠 속 밝게 빛나는 시계를 보면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 교차한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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