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10대 총상에 분노…홍콩 복면금지법 맞선 ‘복면 인간띠’ 등장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7일 00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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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No justice, No peace).”

17주째 대규모 반중(反中)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6일 홍콩 거리에 한 시위 참가자가 빨간색 스프레이로 쓴 문구다. 시위대와 당국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는 홍콩 시위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당국은 5일부터 시위대의 마스크 착용을 금지하는 복면금지법, 계엄령에 해당하는 긴급법을 전격 시행하며 시위대를 거세게 탄압하고 있다. 이 와중에 경찰 총격에 따른 피해자가 2명으로 늘어나면서 시위대의 반중 감정이 극에 달하고 있다.

● 연이은 10대 총상에 분노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1일 고교생 쩡즈젠(曾志建·18) 군의 피격 사흘 만인 4일 또 다른 14세 남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았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는 왼쪽 다리에 총을 맞는 중상을 입었다. 두 피해자와 동년배인 10대 학생들은 쩡 군과 가족을 돕기 위한 모금에 나섰고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는 연좌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까지 모금액만 약 12만6000홍콩달러(약 1923만 원)다.

현지 소셜미디어에는 경찰이 일부 여성 시위대의 뺨을 때리는 동영상, 한 어린아이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지하철 안에 힘없이 앉아있는 동영상 등이 등장했다. 경찰의 어린이 폭행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참혹한 모습만으로도 시위대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최루액에 눈물을 흘리며 시민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외신 기자의 모습도 포착됐다.

일부 시위대는 ‘홍콩 임시정부 선언’을 공표했다. 싱가포르 스트레이츠타임스에 따르면 2차 피격 사건이 발생한 4일 일부 시위대는 미국 독립선언문 일부를 차용한 ‘홍콩 임시정부 선언’을 공표했다. 현 홍콩 관료들의 전원 퇴진, 입법회 즉시 해산, 내년 3월 임시 선거 등의 내용이 담겼다. 중국 정부에는 ‘반란’으로 여겨질 만큼 급진적인 주장들이다.

● 복면금지법 vs ‘복면 인간띠’


6일 홍콩 법원은 반중 성향의 입법회(국회) 의원 24명이 전날 제기한 복면금지법 발효 중지 소송을 기각했다. 이날 최대 번화가인 코즈웨이베이 지역에서는 복면금지법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정면으로 저항하겠다는 의도 아래 각종 마스크와 가면을 쓰고 나타나 “홍콩이여 저항하라”라고 외쳤다.

이중 상당수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해 저항의 상징이 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영국 성공회 수장이던 제임스 1세 국왕을 암살하려 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절대 권력에 저항한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외 영화 ‘아이언맨’ 가면, 고양이 가면, 종이 봉지 등 개성 넘치는 가면을 쓴 시위대가 등장해 주목을 받았다.

전날에도 시내 곳곳에서 마스크를 쓴 시위자들은 인간띠를 만들고 “나는 마스크를 쓸 권리가 있다”는 구호를 외쳤다. 복면금지법을 어기면 최고 징역 1년형에 처하겠다는 당국의 압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 6일 도심 사실상 마비…中 무력진압 우려도

6일 시위대는 눈에 띄게 과격해졌다. 이날 홍콩 지하철(MTR)에 따르면 시위대의 기물 파손 등으로 애드미럴티, 몽콕 등 전체 지하철역(94곳)의 56%가 운영을 중단했다. 오후 9시부터는 모든 지하철 운행이 중단돼 도심 대중교통이 마비됐다. 이날 침사추이 지역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올해 5월 중국 다롄 정상회담 사진도 걸렸다. 사진 밑에는 ‘전체주의 반대(ANTI TOTALITARIANISM)’란 문구가 등장했다.

이날 주요 상점과 쇼핑몰은 아예 문을 닫았다. 불안해진 시민들이 미리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 길게 늘어선 모습도 목격됐다. 일부 시민은 생필품 사재기에 나섰다. 5일 시위에선 중국 이동통신사 차이나모바일 등 중국계 및 친중 기업의 상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물품들이 포장이 터진 채 바닥에 굴러다니는 등 전쟁통을 방불케 했다.

당국의 유혈 진압 가능성도 우려된다. 4일 홍콩에 사는 한 중국인이 시위대를 향해 “우리는 중국인”이라고 말했다가 분노한 시위대에 폭행을 당하자 중국 내에서도 홍콩 시위대를 향한 반감이 커지고 있다. 동영상이 공개된 후 일부 중국인은 “홍콩에 법치는 없다. 홍콩 경찰도 이미 실패했다”며 당국의 개입을 촉구했다.

홍콩 최고 갑부인 리카싱(李嘉誠) 전 CK허치슨홀딩스 회장은 이날 시위 장기화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에 10억 홍콩달러(약 1526억 원)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에 따르면 리 전 회장이 운영하는 자선재단은 “홍콩 경제는 현재 유례없는 도전에 직면했다”며 지원 의사를 밝혔다. 리 전 회장은 8월 홍콩 주요 언론에 반중 시위대를 지지하는 듯한 광고를 실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사이가 나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중국 당국의 초청에도 불구하고 1일 베이징에서 열린 건국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불참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베이징=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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