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죽음[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3> 로스 카츠의 ‘테이킹 챈스’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감독은 이 시나리오로 어떻게 투자사를 설득했을까?’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졌던 의문이다. 이라크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의 시신을 미국의 고향집으로 호송하는 여정. 평범하다 못해 지루할 것 같은 이 실화가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눈물까지 흘리게 만들 줄을 투자사는 어찌 알았을까? 버릴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장면이 훌륭했다. 그리고 여러 번 울컥했다.

마이클 중령은 가족을 핑계로 전쟁터 대신 본토 근무를 자청한 탓에 전사자들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다. 어느 날, 생면부지이지만 같은 고향 출신인 갓 스물의 챈스 일병이 전사한 사실을 알고 그를 고향으로 에스코트하는 일에 자원한다. 중령의 계급으로는 이례적인 일이다.

3400km의 긴 여정이지만 군에서 규정한 예우를 지키며 한순간도 챈스를 홀로 두지 않는다. 갈아탈 비행기를 기다리며 화물 창고에서 챈스가 밤을 보내야 하자 중령도 창고 바닥에서 잠을 잔다. 이런 그를 보고 공항 직원들도 챈스의 관을 정중히 다루며 경의를 표한다. 영구차에 실려 국도를 달릴 때도 성조기에 싸인 관을 본 운전자들이 국가유공자의 시신임을 알고 영구차를 앞뒤로 호위하며 경건하게 에스코트하는 장면은 남의 나라 일이지만 눈물이 났다.

영예로운 죽음이란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우리가 고인을 어떻게 대접하고 기리는가에 따른다. 유족이 바라는 건, 가족의 희생이 값지고 의미 있게 쓰이는 것이다. 좀 더 나은 사회가 되는 데 일조했음을 인정받는 명예가 유족의 자부심이 되어 남은 날들을 살아갈 힘이 되어주기에. 영화는 그런 마음을 헤아리듯 장의사의 손길처럼 조심스럽고도 정성되게 임무를 완수한다.

초등학생 때, 국립묘지로 단체 견학을 갔었다. 철없던 우리는 묘비 사이로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때, 초라한 행색의 노파가 눈물을 훔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그분에게 방해가 되었는데도 할머니는 당신의 슬픔이 우리의 소풍을 망쳤을까봐 미안해하셨다. 짓무른 눈가를 가제 수건으로 누르며 몸을 한껏 웅크리셨다.

군인, 소방관, 경찰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그 일을 택한 이들이다. 우리 사회에도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챈스 일병들이 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챈스처럼 귀하게 대접받고, 남겨진 유족이 국민의 존경과 감사 속에 살고 있는지, 나부터 반성해 본다. 세상이 바뀌어도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의 숭고함의 가치는 달라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그때의 국립묘지로 돌아간다면,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리리라. 그리고 말없이 곁에 있겠다. 그러고는, 열심히 살겠다고 마음먹을 거다. 할머니는 아마 그걸로 됐다고 하실 것 같다.
 
이정향 영화감독
#로스 카츠#테이킹 챈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