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올림픽에 욱일기 휘날리면… ‘침략의 역사’ 면죄부 우려[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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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C 방관속 日 허용 추진 논란
日, 경기장내 반입 허용 이어 패럴림픽 ‘욱일기 메달’ 공개
日 “풍어 기원-출산 축하때도 써”… 韓 “실제 침략전쟁서 쓰인 전범기”
IOC, 스폰서기업 많은 日 눈치봐… IOC 실세 포진한 美-유럽 상대로
올림픽의 평화정신 훼손 설득 필요

일본이 청일전쟁 당시 대규모로 제작해 배포한 전쟁 선전도. 일본 군대가 한국의 평양성을 공략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사진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일본은 ‘니시키에’로 불리는 다색 판화로 전쟁 내용을 선전했다. 이 속에는 일본 군대의 상징으로 욱일기가 자주 등장한다. 욱일기는 공식적인 탄생부터 침략 군대의 깃발로 쓰였다. 독립기념관 제공
일본이 청일전쟁 당시 대규모로 제작해 배포한 전쟁 선전도. 일본 군대가 한국의 평양성을 공략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사진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일본은 ‘니시키에’로 불리는 다색 판화로 전쟁 내용을 선전했다. 이 속에는 일본 군대의 상징으로 욱일기가 자주 등장한다. 욱일기는 공식적인 탄생부터 침략 군대의 깃발로 쓰였다. 독립기념관 제공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군대의 깃발로 쓰였던 욱일기 논란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도쿄 올림픽조직위원회가 경기장 내 욱일기 반입을 사실상 허용한 데 이어 도쿄 패럴림픽조직위원회는 욱일기를 형상화한 디자인의 메달을 공개했다. 국회는 지난달 30일 욱일기의 경기장 반입 금지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하지만 일본은 요지부동이다. 한국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에도 항의했지만 두 기관 모두 “도쿄 올림픽조직위원회와 대화해 보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내놓고 있을 뿐, 욱일기 사용에 대한 명확한 의견은 보이지 않고 있다.

○ 민속 문양에서 19세기 후반부터 군기(軍旗)로

욱일기 논란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욱일기의 기원은 일본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햇살이 퍼지는 문양은 일본 해안 지역에서 풍어와 행운을 기원하는 깃발로 쓰이기도 했고 규슈(九州) 지역 영주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 비공식적으로 사용되던 욱일기는 일본 정부가 1870년 일본 육군 깃발로 채택하면서 공식적인 지위를 얻게 됐다. 1889년부터는 해군기로도 사용됐다.

욱일기는 1894∼1895년 청일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의 상징물로 변했다. 사진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일본은 전황을 국민에게 알리는 수단으로 다량의 판화를 제작해 배포했는데 여기에 욱일기가 자주 등장한다. 욱일기를 앞세운 일본 군대가 서울에서 청나라 병사들을 사살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조선 경성전쟁 일본병 대승리도’를 비롯해 평양성 함락 전투 등 일본의 승리를 선전하는 내용들이다. 이 청일전쟁의 주무대는 한국 땅이었다. 한국에는 그만큼 오래된 침략의 상징이다. 일본은 이러한 욱일기를 태평양전쟁에서도 사용했고 1954년에는 자위대의 깃발로 삼았다. 송완범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교수는 “욱일기는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근대국가의 체제 갖추기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청일전쟁 이후 군국주의로 접어들면서 욱일기는 일왕 국가의 상징이자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육해군의 깃발로서 사용되었다”고 설명했다.

○ 한국에서는 침략의 상징, 일본은 행운의 전통 문양 주장

한국은 욱일기가 많은 이들을 살상한 침략의 현장에서 사용됐으므로 당연히 전범기로 규정해야 한다고 본다. 욱일기를 독일의 전범기인 하켄크로이츠(갈고리 십자)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욱일기와 하켄크로이츠는 다르다고 본다. 하켄크로이츠는 전후 전쟁범죄에 사용된 것으로 판정받고 법적으로 사용이 금지됐지만 욱일기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은 욱일기의 햇살 문양이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외무성 홈페이지를 통해 세계 각국의 깃발 중 욱일기와 비슷한 깃발들을 나열해 보여주고 있다. 북마케도니아 국기를 예로 들기도 했다. 이 국기는 가로세로 선이 사방으로 그어진 모양이다. 또 오늘날 욱일기 디자인은 대어(大漁) 기원이나 출산·명절 축하 깃발 등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오쿠조노 히데키(奧園秀樹)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많은 일본인은 욱일기에 대해 ‘아침에 떠오르는 해’ 정도의 이미지만 떠올린다. 풍어를 기원하는 깃발, 출산을 축하하는 깃발 등에 쓰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느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욱일기 문양이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거부감 없이 쓰이는데 한국이 이를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한국은 일본이 욱일기 문양의 전통만 강조하면서 그 속에 담긴 침략기로서의 역사는 설명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 욱일기의 적법성 논란은 형식 논리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는 “미국은 일본의 일왕제를 유지시키면서 일왕을 포함한 전범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불완전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 욱일기가 전범기로 규정되지 않았을 뿐”이라며 “중요한 것은 군대의 깃발로서 욱일기가 실제로 침략의 현장에서 쓰인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본에는 이러한 욱일기의 역사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아 한국과 일본의 시각차는 더 커질 수 있다. 도쿄의 의류 관련 회사에서 일하는 구와하라 료(桑原稜·25) 씨는 ‘욱일기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태평양전쟁이 떠오르지만 부정적 이미지는 없다”고 말했다. 구와하라 씨는 “친구 6명에게 물었더니 학교 수업시간에 욱일기에 대해 배운 기억이 있는 사람은 1명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박삼헌 건국대 교수(일어교육)는 “일본 내에서도 연령대에 따라 욱일기에 대한 이미지가 다르다. 70대 이상의 고령층에는 전쟁을 회상시켜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전후 세대인 20, 30대 연령층에서는 욱일기가 새로운 내셔널리즘의 기호로 사용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20, 30대는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1980년대 이후에 자라났다. 가해자로서의 교육을 받지 않아 전쟁에 대한 죄의식이 옅다. 여기에 일장기보다 화려하고 시각 효과가 강한 욱일기를 응원도구로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도쿄 올림픽은 국제사회 욱일기 여론의 분수령

내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욱일기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은 큰 방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국가들이 모여 치르는 대규모 행사인 올림픽에서 욱일기가 별다른 논란 없이 대규모로 쓰인다면 앞으로도 국제사회에서 욱일기가 저항 없이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욱일기에 담긴 침략의 의미를 알릴 최고의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과 일본 양국이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욱일기 논란에서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이유다.

욱일기 반입 여부는 IOC가 도쿄 올림픽조직위원회와 협의해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IOC는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갈수록 올림픽 개최 희망 도시가 줄어드는 등 난관에 처한 IOC로서는 도쿄 올림픽의 성공에 방해가 되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다. 또 올림픽 파트너로서 올림픽 최상위 스폰서인 13개 글로벌 기업 중 3곳(도요타, 브리지스톤, 파나소닉)이 일본 기업이다. 한국은 삼성전자 한 곳이다. 올림픽 파트너는 각 기업이 4년 동안 2000여억 원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IOC는 돈줄을 쥐고 있는 일본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한국으로서는 2032년 남북공동 올림픽 개최를 추진하고 있어 역으로 IOC의 입장을 의식해야 하는 점도 있다. IOC는 끝까지 여론을 살피다 대회 개막이 임박해서야 욱일기에 대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결국 IOC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올림픽 전체 참가국들의 여론이다.

한국은 비슷한 아픔을 겪은 중국 및 동남아시아 국가와 연대할 방침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짧은 기간 침략을 당한 데다 일본이 오랫동안 각종 경제 지원 등으로 공을 들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얼마나 동조할지는 미지수라는 말이 나온다.

이 국가들 중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갈등 때문에 욱일기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욱일기 논란이 한국과 일본의 현 정치상황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대결 프레임을 벗어나 욱일기가 올림픽 본래의 평화정신 및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알려야 한다. 또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만을 상대로 해서는 IOC를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다.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미국과 IOC의 실세들이 포진한 유럽 국가 등을 상대로 한 여론 환기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스포츠 기구인 각국 국가올림픽위원회(NOC)를 통한 접촉은 한계가 있다. 많은 국가에서 NOC는 선수 관리 및 육성에 집중할 뿐 정치적 판단은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은 해외 문화원 등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국가별로 욱일기의 실상을 현지에 알릴 다양한 경로를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원홍 전문기자 bluesky@donga.com / 도쿄=박형준 특파원
#도쿄올림픽#욱일기#청일전쟁#전범기#i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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