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때 용돈 좀”[횡설수설/김광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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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인데 떡값이라도 하시라고…” “회식에 쓰시라고…” 등이 뇌물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고전적 표현이다. 적은 금액이지만 성의로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봉투를 열어보면 떡 몇 트럭을 사도 모자라지 않을 금액이 들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뇌물 봉투의 대명사는 ‘촌지(寸志)’다. 마음에 담은 자그마한 뜻 정도인 일본식 표현이다. 일본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작은 금액을 줄 때 촌지라고 적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줄 때는 ‘御례(오레이)’ 또는 ‘松の葉(마쓰노하)’라고 적는다. 예의 차린다거나 솔잎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 귀에 익은 ‘와이로(賄賂)’는 주로 공무원이나 정치인에게 갖다주는 뇌물이다. 중국에서 붉은 봉투란 뜻의 ‘훙바오(紅包)’는 세뱃돈이나 축의금을 의미하는데 촌지 같은 의미도 있다. 거액의 돈이나 상품권을 ‘월병(月餠)’ 상자에 채워 전달했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가끔 보도되는데 우리의 사과 상자가 떠오른다.

▷촌지와 비슷한 의미로 미약한 정성이란 뜻의 ‘미성(微誠)’이란 표현도 쓰였다. 촌지나 미성은 그다지 많지 않은 금액이 대부분이었다. 과거 학부모가 학교 선생님을 찾아갈 때 작은 잡지에 끼워 전달하는 경우가 많아 학교 앞 서점에서는 작은 판형 잡지가 많이 팔린다는 말도 있었다.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돈 봉투가 거의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국토교통부 서울지방국토관리청 간부가 작년에 하도급 업체 등으로부터 총 1100만 원의 뇌물을 받고 하도급 업체 선정 입찰을 방해한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이란 사실이 국감 자료에서 드러났다. 관련 건설업자의 휴대전화에서 “올 때 국장 용돈 좀 준비해 오라”는 문자메시지가 발견됐다고 한다. 마지못해 받은 것이 아니라 대놓고 돈을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이 외에도 국토부 전·현직 직원 20여 명이 건설업자 뇌물·향응 비리 사건에 연루돼 무더기로 처벌되거나 자체 징계를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칼이 손에 있으면 휘두르고 싶은 게 인간의 기본 심성이다. 공무원의 권력은 규제에서 나온다. 규제를 바탕으로 고무줄 같은 재량권을 휘두르는 것이다. 청렴의무 교육을 강화하고,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예 규제 자체를 대폭 없애 부패의 우물을 메워버리는 것이 청렴 사회로 이끄는 구조적인 해결책이자 지름길이다. 여기에 민간의 창의성까지 높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문제는 칼을 가진 자는 좀처럼 스스로 칼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명절#뇌물#용돈#촌지#김영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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