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해도 “우리가 유리하다!” 외치는 장군들을 비웃을 수 없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9일 14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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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떻게 자신감을 얻게 되는가? 어떤 큰 성과를 내거나 큰 지원군을 얻었을 때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딱히 대단한 근거가 있어야만 자신감을 얻는 건 아니다. 우리는 새로 산 구두가 어색하지 않아서 자신 있고, 쇼윈도에 비춰보니 그날따라 차림새가 말쑥해보여서 자신 있고, 3㎝ 키높이 굽을 넣었더니 윗동네 맑은 공기가 느껴져서 자신 있고, 고데기에 머리가 잘 말려서 자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감이 필요한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며 좋은 옷을 꺼내 입는다.

옛날 중국인들도 그랬다.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이 적장의 목을 뎅강 자르기로 유명한 여포가 무슨 꼴을 하고 전쟁터에 나서는지 한 번 보자. 그는 비녀를 세 개나 꼽아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에는 보랏빛 금관을 썼고, 몸은 온갖 꽃을 수놓은 서천의 붉은 비단으로 감쌌다. 갑옷은 괴수가 사람 머리를 꿀꺽 삼키는 문양으로 장식했고, 반짝반짝 빛나는 허리띠는 사자의 형상으로 조각했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방패는 또 어떠한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 싸우러 나가는 아킬레스는 자신의 영혼과도 같은 방패를 챙기는데 그 겉면에는 땅, 하늘, 바다, 태양, 달 별자리들, 그리고 아름다운 성시(城市)를 가득 채운 시민들이 결혼하고 변론하고 싸우는 모습, 밭을 가는 농부들, 추수 때의 왕의 농장, 포도밭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이들, 소 떼의 선두를 습격한 사자를 쫓아내려고 노력하는 목동과 그의 개들, 양 떼 농장, 플로어에서 춤을 추는 젊은 남녀들, 그리고 도도히 흐르는 대양(大洋)이 조각돼 있었다.

여포나 아킬레우스처럼 살아 있는 전투 기계가 아닌 이들도 병기와 갑옷의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다. 로마의 병사들이 머리에 깃털을 꽂고 장군들이 황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것은 깃털과 황금이 쇠보다 단단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근대 영국의 소총병들은 화려한 붉은 코트를 입었지만 붉은색은 보호색이 아니었고, 높이 솟은 검은 곰가죽 모자를 썼지만 가죽은 당연히 방탄기능이 없었다. 사무라이들의 투구에 달린 수사슴의 뿔과 같은 거추장스러운 장식들은 실제 수사슴의 뿔만큼이나 도움이 안됐다. 예쁘니까 입은 거다.

하지만 이 ‘예쁜 것’이 아주 무익한 건 아니다. 고대의 전쟁은 사기 싸움이었다. 최후의 1인까지 목숨 바쳐 싸우는 군대 같은 건 없다. 대체로 대세가 기울어서 승패가 정해졌다 싶으면 패색이 짙은 쪽 병사들은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다. 사기가 바닥나면 자연스럽게 진형이 무너지고 패주한다.

따라서 장군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병사들을 찬양하고 고무하는 것이었다. 수하의 사기를 높이고 또 유지시키기 위해선 우렁찬 목소리와 완력만큼이나 눈에 보이는 요소들이 중요했다. 그래서 장군들은 대개 수탉처럼 화려하게 입었다. 특히 머리에 신경을 썼는데, 모자와 장식품들은 대체로 하늘 위로 솟구쳐서 착용자의 키가 커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지도자가 예쁘게 차려 입거나 몸에 문신을 하는 것만으론 수하의 사기가 충분히 차오르지 않는다. 말(馬)을 타고 쳐들어오는, 그래서 키가 커 보이는 적에 맞서 높은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言)의 도움이 필요하다. 장군들은 병사들을 향해 끝없이 독려의 말을 외친다. “‘우리가 이긴다. 우리가 유리하다”고 말한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유리하다!”라고 외치는 장군들을 비웃을 순 없다. 근거가 있어서 자신감이 생기는 게 아니라 일단 어떻게든 자신감을 창조해내고 나면 근거는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전쟁 전에는 냉철한 참모의 분석을 중시하되 개전 이후에는 장군의 심장을 믿어야 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이 무거운 이유는 카이사르가 주사위를 두 번 던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루비콘강을 건넜으면 주사위를 다시 던져보고 군대를 물릴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모두 함께 각오하고 뛰는 편이 승률이 높다. 일상사 모든 게 전쟁 같은 지금 시대, 우리가 마음 깊이 새겨야할 전략이다.

안동섭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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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281호(2019년 9월 15일자)에 실린 글 ’꽃단장과 말발로 무장… 자신감이 승리의 원동력‘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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