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그랬는지…’ 연쇄살인사건과 우울하지 않은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6일 17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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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그랬는지/잊어버렸는지/가방 안 깊숙이/넣어두었다가….’

임희윤 기자
임희윤 기자
‘우울한 편지’의 우울한 선율이 생각나버린 것은 그 뉴스 때문이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특정됐다는 소식. 영화 ‘살인의 추억’은 우수의 흰 벽에 겹겹이 쌓인 안개 성 같은 이 노래의 해자에 독특한 방식으로 다리를 걸쳐놨다. 음산하고 조금 웃긴 영화의 분위기에 문득 재즈적 화성의 건반, 이국의 냇물 같은 플루트의 선율 줄기가 끼얹어지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1. ‘살인의 추억’은 남자의 영화다. 여성만을 희생시키는 남성 살인마를 땀내 나는 남성 경찰들이 사냥개처럼 뒤쫓는다. ‘우울한 편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야 경찰서 사무실의 원경이나 채우던 여성 경찰이 화면 앞으로 나온다. 범행 날마다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공교롭게도 ‘우울한 편지’란 곡이 전파를 타고 신청엽서는 모두 한곳에서 배달됐다는 점을 여성 경찰이 지적한다. 비 오는 날 빨간 옷 입고 함정수사에 투입되는 수동적 역할이 아니다. 남성 경찰들에게 커피를 타주는 대목에서 ‘우울한 편지’를 매개로 여성이 등장해 그 역시 경찰의 일원이며 다른 경찰이 놓치고 있는 지점을 지목한다.

#2. 연쇄살인범이 고도의 지능을 지녔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있다. 수많은 경찰, 재능 있는 형사나 탐정의 수사마저 따돌리고 결정적 증거를 남기지 않은 채 유유히 다음 살인을 계획하는 냉혈한…. 만약 그가 차가운 지능에 기이하게 따뜻한 감성까지 갖췄다면? 이런 상상은 살인을 다룬 예술작품에 더할 나위 없는 기폭제가 된다. 영화라면 인상적 사운드트랙까지 확보할 수 있으니 제작진 입장에서는 나쁠 것 하나 없는 설정.

#3.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 박사(앤서니 홉킨스)가 경관을 도륙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렉터는 바흐 마니아다. 피 칠갑 현장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우아하게 식사를 마무리하는 모습은 그의 도착적 성격을 압축해 보여준다. 바흐는 흥분하는 법이 없다. 한 음, 한 음을 쌓아 수학적 아름다움을 건축한 바흐의 음악은 렉터를 위한 최상의 사운드트랙이다. 또 다른 살인자 ‘버팔로 빌’(테드 레빈)이 여성을 납치할 때는 톰 페티 앤드 더 하트브레이커스의 ‘American Girl’이 흐른다. 어떤 미국 여자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극중 사회적 공포를 은유한다.

#4. 때로 음악은 사운드트랙에 머물지 않는다. 살인의 동기도 된다. 미국의 전설적 살인마 찰스 맨슨은 비틀스의 광팬이었다. 순백의 표지 덕에 ‘화이트 앨범’이란 별칭을 지닌 비틀스의 1968년 앨범 ‘The Beatles’는 맨슨의 기행에 동기를 줬다. 헤비메탈의 초기형태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 광기어린 곡 ‘Helter Skelter’가 특히 그랬다. 맨슨은 애매한 가사에서 인류 최후의 인종 전쟁에 관한 숨은 메시지를 발견했다며 살육을 시작했다. 맨슨은 스스로 작곡과 노래를 하는 포크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형편없었다.

#5. 오스트리아 팝 스타 팔코의 히트 곡 ‘Jeannie’는 ‘살인의 추억’을 팝송 하나에 옮겨놓은 듯하다. 가사가 대부분 독일어라 알아듣기 힘들며 후렴구에서 애타게 외치는 ‘Jeannie!’가 애수에 찬 악곡과 맞아떨어지므로 영락없이 떠나간 연인 지니를 찾는 발라드 같지만, 아니다. 도입부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 중반부에 들리는 뉴스 보도와 경찰 사이렌 소리…. 이 곡은 혼자 헤매는 소녀를 쫓는 누군가에 관한 노래다. 인기도 얻었지만 내용 때문에 유럽 여러 방송국에서 금지곡도 됐다.

#6. 맨슨의 예에서 보듯 범죄자와 음악의 밀월은 상업적 예술의 환상에만 존재하는 소품이 아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살해의 순간에 그리스 음악가 방겔리스가 만든 영화 ‘1942, 콜럼버스’의 유명한 주제곡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연쇄살인범은 아니지만 탈주범 지강헌은 인질극을 벌이며 대치하던 경찰에게 비지스의 ‘Holiday’를 틀어 달라 요청했다. 훗날 ‘홀리데이’란 영화도 만들어졌다.

#7. 누구나 음악을 좋아한다. 가끔은 공연장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 공중도덕은 지키지 않으면서 나와 같은 음악에 열렬히 감동하는 사람들. 그럴 때마다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아니,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새삼 생각한다. 음악은 아름답다. 사람은 가끔 추악하다. 사람은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임희윤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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