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관찰[내가 만난 名문장]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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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인
문보영 시인
“그럼 당신은 나와 함께 관찰해줄 겁니까?”

―헨리 제임스, ‘정글의 짐승’

내가 메고 다니는 백팩에는 한 장의 일기가 들어 있다. 이 일기는 가방의 가장 안쪽, 가방을 멘 사람의 등이 맞닿는 깊숙한 곳에 있다.

등에 메고 다니는 이 일기는 ‘나는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로 시작한다. 사실 떠올릴 때마다 매번 바뀐다. 기억 속에서 매번 다른 것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헨리 제임스의 단편 ‘정글의 짐승’은 사랑에 관한 소설인데, 두 등장인물 마처와 바트램은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 대신 “당신은 나와 함께 관찰해줄 겁니까” 하고 묻는다. 사랑하는 존재는 서로를 가장 가까이서 관찰하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알 수 없는 눈앞의 세상을 함께 관찰하는 사람들인지도.

마처와 바트램이 사랑에 빠진 건 과거의 어떤 한순간 때문이다. 소설은 그 순간을 되새김질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장면은 둘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관찰된다. 공동 관찰이라는 행위로 인해 기억은 박제되지 않고 매번 새로워진다. 그래서 ‘기억’이라는 동물이 끊임없이 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을 것이다. 마처에게 바트램이 인생을 함께 관찰하는 동반자였다면 나에게는 일기가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가 한 장의 일기, 한 장의 기억을 등에 메고 다니는 것은 그 순간을 계속 관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중한 기억이 있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계속 끌고 가는 일일 텐데 소중한 기억은 휘발성이 남달라서 자꾸 사라지려 든다. 그래서 관리를 해줘야 한다. 등에 메고 다녀서, 그래서 가방에서 책을 꺼낼 때 이따금 눈이 마주치도록 하거나. 기억을 덫이나 지뢰처럼 심어 두는 것이다. 기억이 계속 폭발할 수 있도록. 기억은 일회성에서 벗어나 내 곁에서 계속 움직일 수 있다.

문보영 시인
#헨리 제임스#정글의 짐승#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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