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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는 꼭 후손이 직접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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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는 꼭 후손이 직접 해야 하나요

김수연 기자 , 여주=신규진 기자 , 김자현 기자 입력 2019-09-09 03:00수정 2019-09-09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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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 2019]<7> 해마다 갈등빚는 추석 성묘예법
《추석 벌초 문제를 놓고 얼마 전 부모님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장손인 제가 “앞으로 벌초는 대행으로 하고, 직접 찾아가는 건 명절이 아닌 기일에 맞추자”고 건의한 탓이죠. 아버지는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다”며 역정을 내십니다.

집안의 후손들은 대부분 서울에 삽니다. 선산에 가려면 편도 5∼6시간은 걸리죠. 작년 추석 즈음엔 친척들이 모여 10기가 넘는 묘를 손수 벌초하다가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자주 빠지는 자제들을 두고 고성이 오간 것이죠. ‘벌금을 거둘까, 당번을 정할까’ 조상님 앞에서 말다툼이 이어졌습니다.

조상의 묘를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건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지만 사는 곳도, 살아가는 모습도 너무 다르다 보니 ‘성묘’를 둘러싼 예법을 전부 따르는 건 쉽지 않죠. 가족 간 불화를 줄이고 전통도 이을 수 있는 지혜로운 해결책이 없을까요? 》


“벌초 문제로 형제들과 다투지 말고, 이 돈으로 지혜롭게 해결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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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 황씨 중앙종친회 종무기획이사인 황병극 씨(58)의 어머니는 6년 전 자식들 앞으로 500만 원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해마다 추석이면 ‘벌초를 누가 하네’ 하며 서로 눈치를 주는 자녀들을 보며 내린 결정이다. 형제들은 이 종잣돈에다 각자 자발적으로 낸 금액을 더해 ‘형제기금’을 만들었다.

그 뒤로 벌초에 참여하지 못할 땐 기금을 내고, 벌초를 자발적으로 맡은 형제에겐 수고비를 주는 게 이 집안의 새로운 룰이 됐다. 황 씨는 “경북 영주의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로 벌초대행까진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전통이란 이유로 의무만 강요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어머니의 지혜 덕분에 벌초로 수고한 형제에겐 금전적 보상을 하다 보니 갈등이 많이 사라지고 우애도 돈독해졌다”고 전했다.

해마다 추석이면 성묘와 벌초를 둘러싼 갈등이 되풀이된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최순권 학예연구관은 “성묘는 본래 묘를 살피며 잡초를 제거해 봉분을 깨끗이 관리하는 게 핵심”이라며 “지역에 따라선 추석 직전 벌초만 하기도 하고, 이와 별도로 추석 당일 묘 앞에서 주과포(술, 과일, 포)를 올리는 ‘묘제’를 지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원칙이 없기 때문에 가정마다 지내는 방식을 두고 세대 간 갈등이 벌어지곤 한다. 황 씨의 집안은 ‘벌초’ 갈등을 줄이기 위한 묘안을 발휘한 셈이다.

물론 벌초를 반드시 후손들이 직접 해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 이는 많은 가정에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국학진흥원 김미영 수석연구위원은 “과거에도 양반들이 성묘할 땐 직접 벌초를 하지 않았고, 머슴이나 묘지기를 썼다”며 “현대식으로 해석하자면 벌초대행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7년째 벌초대행을 해온 경기 여주시의 이창호 씨(49)는 추석을 코앞에 둔 4일 취재진과 만났다. 그는 “요즘 농촌엔 청년들이 부족해 태국인 근로자 4명과 함께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이날 벌초대행을 부탁한 이는 70대 전직 교수다. 그동안 낫을 들고 손수 벌초를 했지만 기력이 쇠해진 탓에 대행을 맡겼다고 한다. 100m 산길을 올라간 이 씨는 일꾼들과 함께 묘 앞에서 묵념을 한 뒤 작업 전후 봉분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직접 오지 못하지만 궁금해할 후손들에게 사진을 전송하기 위해서다.

그는 “가족들의 묘를 벌초한다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작업을 하려고 노력한다”며 “깨끗해진 묘에 자손들이 나중에 찾아와 비석을 닦는 식으로 조상에 성의를 표할 수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송경희 여주 대신농협 과장은 “농협에서 벌초대행을 중개한 지 10년이 됐는데, 워낙 깨끗이 단장해드리는 것을 보며 묘 하나당 8만∼10만 원은 비싸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자손들을 위해 여러 군데 흩어진 묘를 합치는 가문도 있다. 경주 손씨 가문의 25대 종손 손성훈 씨(64)는 최근 1년 반에 걸쳐 묘를 이장해 한 군데로 모으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직계와 방계를 아울러 약 80위나 되는 묘를 옮기겠다고 하자 문중 어르신들이 크게 반대해 설득하는 데만 3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을 한 건 후손들을 위해서였다.

손 씨는 “가족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고 후손들은 외국을 포함해 이곳저곳에 흩어져 산다”며 “이런 상황에서 각각 떨어져 있는 선산을 전부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후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이런 결단을 내렸지만, 성묘 방식까지 강요하진 않을 생각이다. 손 씨는 “조선시대도 전기와 후기의 예법이 크게 다르듯, 방식은 언제나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추석 당일 반드시 묘제를 지내러 성묘를 가야 하느냐, 부부 중 남자 배우자 쪽의 성묘만 챙겨야 하느냐는 문제도 자주 등장하는 논란거리다. 이철영 동국대 생사의례산업학과 겸임교수는 “묘제를 추석 당일에 지내거나, 남자 배우자의 조상 묘만 찾아뵙는 것을 원칙이라고 하긴 어렵다”며 “‘귀찮기 때문에 성묘를 안 하겠다’는 태도만 아니라면 어떤 경우든 가족의 사정에 맞춰 가정의례를 지키는 형식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수연 sykim@donga.com / 여주=신규진 / 김자현 기자
#추석#성묘예법#벌초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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