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 반납[횡설수설/우경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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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24년 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당시 얻은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 지위를 포기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월 26일 “WTO가 중국 등 20여 개국의 개도국 혜택을 90일 이내 철회하지 않으면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 대우를 중단하겠다”고 트윗글로 압박했고, 그 시한이 다음 달 23일이다. 미국과 중국의 고래 싸움에 등 터질까 봐 이미 대만과 브라질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가 개도국 지위를 자진 반납했다.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주는 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이 1953년 67달러에서 지난해 3만 달러가 넘어선 나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여 년간 한국이 유일하다. 워낙 압축성장을 하다 보니 개도국이 아니라는 데 심리적 저항감이 있지만 경제지표로만 보면 선진국이라 봐도 무방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개도국 지위를 철회하는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주요 20개국(G20) 회원, 고소득 국가(세계은행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 1만2056달러 이상) 등 네 가지 기준을 제시했는데 한국은 이 기준에 모두 해당한다.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한국은 독특한 길을 걸어왔다. 3일 세상을 떠난 이매뉴얼 월러스틴 미 예일대 석좌교수는 개별 국가가 아닌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분석했다. 앞서 근대화를 이룬 중심부 국가들이 주변부 국가를 착취하는 구조인 세계 분업 체제에서 주변부 국가들은 저발전 상태에 고착된다. 예외가 있다. 바로 한국과 대만이다. 월러스틴 교수는 이를 ‘미국의 초청에 의한 발전’이라고 했다. 미국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국가가 충돌하는 지점에 놓인 두 나라에 막대한 원조를 했고 자유무역질서로 편입시켰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도 “한국과 대만의 경제적 성공은 매우 특수한 경험으로 다른 개도국들의 모델이 될 수 없다”며 ‘한강의 기적’이 전파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개도국 지위 포기는 상징적인 선언에 가까워 별도의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농업 부문은 낮은 관세, 높은 보조금을 적용받고 있어 농민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그동안 누리던 특혜를 당장 뺏기는 것은 아니고 새로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WTO 내 다자간 무역협상은 지지부진하고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 대세라 ‘우리 하기 나름’이라고 정부는 판단하는 모양이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세계 무역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는 것. WTO 가입으로 고속 성장의 티켓을 끊었듯, 이번 개도국 지위 포기가 농업을 혁신할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wto#개발도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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