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낯선 땅에서 삶의 소용돌이를 마주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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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탕/이승우 지음/240쪽·1만1200원·현대문학

‘고급지다.’

틀린 표현인 거 아는데, 굳이 이렇게 부르고 싶다. 이 소설, ‘…스럽다’랑은 어울리지 않는다. 정희승 작가의 사진을 품은 외피도 근사하지만, ‘캉탕’은 작품 자체가 기품 있다. 저자로선 듣기 거북할 수 있겠으나, 살짝 지적 허영을 충족시켜 준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난해할 거란 선입견은 가지지 말자. 오히려 플롯은 꽤나 단출하다. 마음의 병 비슷한 게 생긴 주인공 한중수.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J의 조언을 듣고 여행을 떠난다. J의 외삼촌 핍이 사는, 대서양 어딘가 이름 모를 항구 캉탕으로. 그 낯선 땅에서 한중수는 생경한 사람과 풍경을 마주한다.

하지만 그 밋밋한 여정은 심연에 폭풍을 감추고 있다. 외지인에겐 당황스러운 제주 날씨를 닮았다. 특유의 습기를 머금은 채 부산스레 변하는 하늘처럼. 맑다가 흐리고, 거칠다가 여릿한 삶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발목까지 차오른다.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드는, 혹은 주저하는 갈림길에 서서.

“미로와 같은 복잡한 행로, 근원을 알 수 없는, 예기치 않은, 대비할 수 없는 덮침. 나는 그런 것을 경계한다. 그런데 경계한다는 것은 예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캉탕’의 또 다른 매력. 괜한 처연함에 빠져들지 않는다. 굵디굵은 문장이 낯간지러운 하소연에 그칠 수 있었던 자기고백을 묵직한 울림으로 바꿔 놓는다. 게다가 ‘모비 딕’과 ‘오디세이아’와 ‘성경’, 그리고 살짝 양념으로 뿌린 ‘그리스인 조르바’. 소설 속에서 어지러이 뒤섞인 텍스트가 어느새 한껏 버무려진 향연으로 흥을 돋운다. 의외로 끝자락엔 반전(?)도 숨어있는데, 별것 아닌 양 툭 튀어나오는 맛이 꽤나 야무지다.

책을 덮은 뒤 인터넷에서 ‘캉탕’을 뒤져봤다. 혹시 ‘깡땅’은 아닐까, 프랑스 어디쯤이 아닐까. 잠깐 범인을 쫓는 탐정 기분을 내며. 영 실마리를 찾지 못하다, 문득 다시 책을 손에 들어 본다. 뭔가 변했다. 처음부터 이리 무거웠던가. 얼마큼인진 모르겠지만, 마음 몇 그램쯤 뺏어갔을지도. 그럼 떠날 때가 돌아왔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캉탕#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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