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文정권의 후안무치에 숨어있는 계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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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모르는 조국과 집권세력
특혜 의혹 대상이 황교안 가족이었어도 조국 옹호 같은 논리 폈을까
중도층 이탈 무릅쓴 조국 강행 고집은
핵심 지지세력 다지고 선거법 개정으로
범좌파 연대해 집권후반기 끌고 가는 전략

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와 ‘마음’

요즘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소설 제목들이다.

‘부끄러움…’은 고 박완서 선생이 1974년 발표한 작품이고, ‘마음’은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1914년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부끄러움…’에는 속물근성과 이기심으로 뭉쳐 있으면서도 정작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마음’에는 도쿄제국대 재학시절 자신과 친구가 함께 연모했던 하숙집 딸을 얻기 위해 정직하지 못한 방법을 썼다가 친구를 잃은 뒤 평생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다 죽음을 택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인간은 생존과 더 많은 욕구 충족을 위해 끊임없이 욕심을 내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런 욕망의 질주 중간 중간 걸음을 멈추고 부끄러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마지막 보루가 아닐까.

요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장면들은 그대로 소설로 옮겨도 창작보다 몇 배 더 적나라하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군상의 본색’을 보여줄 것 같다.

조 후보자에 대해선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드러난 위선과 탐욕의 실체 앞에서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는 그 멘털리티는 아마도 훗날 정신분석학, 심리학에 소중한 연구사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조 후보자가 “관례였다”고 주장하는 그 관례들 속에 위·변조 의혹 행위도 포함되는지, 어떻게 산더미 같은 특혜가 조국 가족에게만 순차적으로 차례차례 주어진 것인지, 더구나 그 특혜들 대부분은 수혜자가 요청한 적도 없다는데 그럼 도대체 알아서 바친 메커니즘의 비밀이 무엇인지는 검찰 수사에서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조 후보자야 그렇다 쳐도, 국민들이 정말로 어이없어 한 건 여권 인사들의 행태다. 유시민 이재명 박원순 이해찬 등등의 인사들이 한쪽 지향성의 발언을 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처럼 어이없는 수준은 처음이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발언이 어떤 수준인지 자가측정해 보려면 간단한 방법이 있다. 자신의 발언 녹취록에서 조국이라는 이름을 지운 뒤 황교안이나 나경원이라고 써넣고 다시 읽어보라. 10년, 20년 후 자신의 자녀가 이번 발언 기록을 읽게 되는 경우를 상상이나 해 봤을까.

사실 후안무치는 ‘사이비 386’의 본색이다. 이념서적 몇 권 읽고는 세상을 선악 구도로 나누고, 특수한 시대적 고민의 산물인 “목적 달성을 위해선 합법적 수단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편의적으로 연장시켜 온갖 자기합리화 논리로 무장했다.

물론 이번에는 논리가 궁색하다는 걸 그들도 내심 알았을게다. 그럼에도 앞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건 ‘조국 임명은 결코 물러서면 안 되는 전투’라는 청와대의 통치전략 차원 판단 때문이었을 게다.

약 두 달 후면 집권 후반기에 접어드는 문재인 정권이 여당 장악력을 잃지 않고 총선을 치르려면 핵심 지지 세력을 다져야 한다. 전두환 독재치하에서 별다른 학생운동 경력도 없지만 어쨌든 운동권, 진보의 상징처럼 포장된 조국은 핵심 지지 세력이 추종하는 대표 스타다.

이 대목에서 유시민 등이 일제히 나선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즉 그들이 겨냥한 청중은 국민전체가 아니었을 것이다. 보수진영은 물론 중도층 조차 어이없어 한 억지 논리였지만, 나름대로 얼개를 맞춰 자기 완결성을 갖췄다. 불리한 팩트는 다 뜯어내고 유리한 것들만 별자리 잇기처럼 교묘히 연결시켰다.

즉, 조국 의혹에 마땅히 대응할 논리가 없어 풀죽어 있는 지지자들의 마음속에 싹튼 회의(懷疑)를 털어내고 수구세력에 맞서 성전(聖戰)을 펼칠 수 있는 방패 같은 논리를 제공한 것이다. 실제로 친여 인사들이 일제히 옹호 발언을 한 이후 지지층 결속이 급격히 이뤄졌다. 관계자에게 전화를 거는 유의 은밀한 지원과 동시에 방송과 인터넷에서 체면이 망가지는 걸 감수하고 ‘희생’한 것이다.

조국에게 집착하다 놓치는 산토끼들이 너무 많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었겠지만 여기에도 비책이 있다. 바로 패스트트랙에 올려놓은 선거법 개정이다.

중도층을 놓쳐 더불어민주당 지지가 하락해도 비례대표제 확대를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이 이뤄지면 정의당 등의 의석수가 대폭 늘어나 범진보세력이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일 것이다. 게다가 자유한국당은 쪼그라들 테니 집권 후반기를 끌고가는 데 문제가 없다고 봤을 게다. 그리고 민주당을 떠나간 젊은층, 중도층은 한국당으로 가지 않고 범진보 내 무당파로 남아있을 것이며, 대선 땐 다시 자석처럼 끌어당길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이처럼 집권세력이 조국 임명 강행을 고집하는 바탕에는 핵심 지지층을 다지고 중도층 상실분은 선거법 개정으로 상쇄한다는 셈법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런 정치공학적 계산이 책략가들의 예측대로 이뤄진 사례는 거의 없다.

문 정권의 특질을 고려하면 이번 조국사태의 결말은 그리 궁금할 게 없다. 정말 궁금한 건 궤변을 늘어놓았던 이들의 훗날 표정이다. 부끄러움을 못 견뎌 발언 기록을 지우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까, 아니면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여전히 배우지 못한 채로 또 다른 자기합리화를 늘어놓고 있을까.

이기홍 논설실장


#조국 의혹#조국 옹호#문재인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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