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배우니 세상이 달라보여”…황혼기에 한글 배우는 할머니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3일 15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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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배운 한(恨)은 오래 간다. 어린 시절 그렇게도 혹독하던 가난, 서울로 유학 간 오빠 뒷바라지, 여자는 학교에 보내지 않던 시대. 배우지 못한 이유도 저마다 모두 다르다. 그런 분들이 인생의 황혼기에 펜을 잡았다.

글을 배우니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다. 농기구 안에 ‘ㄱ(기역)’이 있고, 곶감 안에 ‘ㅎ(히읗)’이 숨었다. 이름이 ‘분한’인 할머니는 “구십에 글자를 배우니 분한 마음이 몽땅 사라졌다”고 썼다.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뒤늦게 연애편지의 답장을 보낸 할머니도 있다. 4~6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야외에 전시될 ‘2019년 성인 문해(文解)교육 시화전’ 최우수상 수상작들을 미리 살펴봤다.

● 글자 배우니 새로 보이는 세상


“오만데/ 한글이 다 숨었는 걸/ 팔십 넘어 알았다

낫 호미 괭이 속에/ ㄱ ㄱ ㄱ

부침개 접시에/ ㅇ ㅇ ㅇ

달아 놓은 곶감에/ ㅎ ㅎ ㅎ

제아무리 숨어봐라/ 인자는 다 보인다” (숨바꼭질, 정을순)

경남 거창군청 문해교실에서 작품을 낸 정을순 할머니(83)는 여든이 넘어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한글을 배우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정 할머니는 “밭일이 힘든 날에는 공부하러 가기 망설여질 때도 있다”면서도 “글을 깨우치고 나니 모든 것에 글자가 숨어 있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뒤늦게 글을 배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새로운 세상’을 느끼게 된 심정을 시로 표현했다. 글을 배운 것이 인생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는 것이다.

경북 안동시의 권분한 할머니(86)는 이제 이름과 달리 분하지 않다. 권 할머니가 쓴 시인 ‘내 이름은 분한이’에서는 할머니 이름이 ‘분한’인 이유가 나온다.

“우리 어매 딸 셋 낳아 분하다고 지은 내 이름 분한이

내가 정말 분한 건 글을 못 배운 것이지요.”

권 할머니는 자신의 시에 “글자만 보면 어지러워 멀미가 났지만/ 배울수록 공부가 재미나요/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라며 “구십에 글자를 배우니까/ 분한 마음이 몽땅 사라졌어요”라고 읊었다.

19세에 결혼해 5남 1녀를 낳아 키운 권 할머니는 “글을 배우는 요즘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 뒤늦게 글 배워 쓰는 사랑 노래

이번에 문해교육을 배운 뒤 작품을 제출한 어르신은 전국 609개 기관, 1만5894명에 달했다. 인생에서 처음 글을 배운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읽는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작품도 적지 않았다.

전남 영암군청 문해교실에서 글을 배운 이문자 할머니(65)는 호남 사투리가 고스란히 담긴 자신의 입말로,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지천이 꽃 단장한 오월 어느날

하얀 구름타고 하늘나라 소풍 가신 당신

학교 이름도 요상한 호맹이학교 댕긴다고

나보다 더 조아하셨는디

조아한다고 팬지(편지)쓸라 햇는디

쪼그만 더 살다 가시제

인자 숙제는 누가 바주까요

틀린 글자는 누가 바주까요

테레비 보다가 몰른 글자는 누가 바주까요

알콩달콩 홍복대기(콩 볶으며) 살앗는디요

그래도 걱정마시요

호맹이학교 가믄

선상님이 다 갈챠(가르쳐) 줍디다

내 옆지기 여보당신 겁나게 보고 잡소” (헤어진 연습도 업시 가븐 당신깨, 이문자)

인천시 평생학습관 윤천순 할머니(67)는 젊은 시절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연애편지에 이제야 답장하는 사연을 적었다.

“꽃다운 시절 첫사랑 그님에게/ 연애편지를 받았어요

글 모르는 까막눈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얼굴만 붉혔어요

(중략)

서러운 까막눈 세월 60년 보내고/ 한글자 한글자 열심히 한글배워

님이 주신 연애편지 읽고 답장을 씁니다

기성아부지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요/ 앞으로는 내가 연애편지 많이 쓸게요

나도 당신 사랑합니다” (연애편지, 윤천순)

할머니가 글을 배워 이 시를 썼을 때는 이미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 문해교육 어르신 작품, 3개월 동안 전시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최우수상을 받은 10명을 포함해 특별상 40명, 우수상 72명 등 122명을 선정해 시상했다. 이들 작품은 4~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인근에 전시되는 것을 시작으로 9~11월 서울시청 등 전국 80여 곳에서 선을 보인다.

교육부는 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시화전 시상식 겸 문해의 달 선포식을 연다. 2017년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읽기 쓰기 셈하기가 어려운 18세 이상 성인의 수가 전체의 7.2%인 311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문해교육을 통해 모든 국민이 생각한 것을 마음껏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교육부가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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