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도 실력도 투표로… 문화에 ‘취향’은 없고 ‘순위’만 남는다[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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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좌지우지하는 팬 투표… 1990년대 ARS로 실시간 참여
아이돌 등장하며 가요계 전면에… 슈퍼스타K 등 경연프로 시작되자
팬 투표가 모든 걸 결정하게 돼, 일각선 유료 문자 등 돈벌이 악용
‘프로듀스X101’ 투표조작 의혹처럼 시장과 여론 왜곡시키는 부작용도

임희윤 문화부 기자
임희윤 문화부 기자
‘투표에 다 건다.’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외 대중문화계에 불고 있는 새로운 슬로건이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스마트폰의 단체 메시지방에는 ‘투표하자!’는 독려가 범람한다. 4년에 한 번 하는 선거 이야기가 아니다. 문화계와 사회 이슈를 때로 좌지우지하는 투표는 천문학적 투표수의 실시간 집계가 가능해진 스마트 시대를 휩쓸고 있다.

최근 엠넷 ‘프로듀스X101’(이하 프듀X)의 시청자 투표수 조작 의혹은 결국 경찰 수사까지 받는 데 이르렀다. ‘프듀X’의 조작 의혹은 7월 19일 마지막 생방송 때부터 제기됐다. 일부 팬들은 이날 경연에서 유료 문자 투표 합산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오고, 순위 득표수에서 이해하기 힘든 규칙성이 발견되자 진상규명위원회를 조직했다. 의혹이 커지자 엠넷 측은 7월 26일 발표문을 내고 “자체 조사를 진행했으나 사실 관계 파악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돼 수사를 의뢰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달 31일 방송사(CJ ENM)의 프로그램 제작진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더구나 투표 조작 의혹은 같은 방송사의 다른 프로그램(‘아이돌학교’ ‘프로듀스48’)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 인터넷, 실시간 투표의 탄생

인기투표는 오랜 시간 대중문화의 꽃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로 실시간 참여가 가능해지면서 ‘투표 시장’은 과열되기 시작했다. KBS ‘가요톱텐’은 1990년대 들어 PC통신과 전화 ARS를 이용한 시청자 실시간 순위 참여 시스템을 도입했다. 불꽃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H.O.T.(1996년 데뷔)를 비롯한 케이팝 아이돌 그룹과 열혈 팬덤의 등장이다. 각종 가요 프로그램들이 잇따라 투표를 예능적 요소로 전면에 걸었다. 1, 2위 후보를 놓고 실시간 그래프로 투표 현황을 보여주는 연출로 긴장감과 참여도를 극대화했다.

댄스그룹 팬덤을 중심으로 젊은 마니아들의 전유물이던 문화계 인기투표 열풍은 2009년 새 단계를 맞았다. 엠넷 ‘슈퍼스타K’의 출범이다. 젊은이들 위주였던 TV 가요 경연의 참가 연령을 넓히고, 심사위원단의 점수보다 시청자들의 문자 투표 점수를 더 많이 반영하자 열기가 비등점에 달했다. 국민 참여 신화의 절정은 2010년 ‘시즌2’ 결승전. 환풍기 수리공 출신 허각, 미국에서 온 ‘엄친아’ 존박이 맞붙었는데, 예상을 깨고 허각이 우승을 차지했다. 문자 투표의 힘이었다.

○ 경연 프로 붐… 국민 프로듀서의 등장

2011년 가수 비의 ‘타임 100’ 온라인 투표 1위는 종교적 충성도를 지닌 팬덤이 투표를 통해 어디까지 이뤄낼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2000년대부터 한국 가수로는 이례적으로 월드투어를 하며 ‘월드스타’ 수식어를 받은 비이지만 ‘타임 100’ 정상은 의외였다.

2016년 시작한 엠넷 ‘프로듀스 101’은 현재의 투표 대란 사태를 견인했다. 시청자에게 ‘국민 프로듀서’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시청자 투표 결과만으로 순위를 결정하는 국내 최초의 프로그램. 특히 2017년 시즌2부터 투표 광풍은 본격화됐다. 특정 연습생을 응원하는 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지하철 플랫폼에 ‘우리 ××를 뽑아달라’는 광고를 게시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김윤하 평론가는 “‘가요톱텐’ 시절부터 존재한 투표는 이제 팬 활동의 핵심이자 피를 말리는 노동으로 확대, 변질되고 있다”며 “투표 과열은 케이팝 아이돌이 본격적으로 가요계를 점한 뒤 두드러지기 시작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팬은 주변인들에게 투표를 부탁하거나 스스로 여러 개의 아이디를 만들어 투표수를 늘리는 활동에도 나섰다.

○ 선의의 독려 넘어 투표권 거래까지

투표를 매개로 한 유료 문자 수익과 광고 홍보 효과는 사업화로 이어졌다. 아이돌 팬덤의 투표 열기를 이용한 시상식이 10여 년 전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팬덤이 만들어내는 수치에 가장 익숙한 음원서비스들이 발 빨랐다. 멜론이 2009년 멜론뮤직어워드를 신설한 데 이어 가온차트(2011년), 소리바다(2017년), 지니(2018년)가 시상식을 만들었다. 근년에는 언론사들도 한류 시상식이나 뮤직 어워드를 앞다퉈 만들고 있다. 이들 시상식에는 하나같이 ‘인기상’ ‘최다 투표상’ 같은 부문이 있다. 가수의 팬들에게 유료 문자 투표나 SNS 해시태그 투표를 독려한다.

최근에는 아예 투표와 차트를 전문으로 하는 사이트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아이돌차트, 아이돌챔프, 베스트아이돌 같은 서비스는 웹이나 앱을 통해 매주 투표를 진행한다. ‘웃음이 가장 매력적인 아이돌은?’부터 ‘효도를 가장 잘할 것 같은 아이돌은?’까지 매주 다른 주제를 던져 팬 투표를 끌어낸다.

자신이 응원하는 아이돌의 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팬들은 각종 시상식과 차트의 투표 ‘좌표’(투표 링크 URL)를 SNS에서 공유한다. 수만 건에서 수십만 건의 투표가 매주 쏟아진다.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은 “차트와 시상식, 경연 프로의 투표 영업이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순위를 자주 공개하면서 마치 영업사원들에게 그래프를 보여주며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채찍질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됐다”면서 “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투표에 참여하는데, 유료 문자와 광고비 수익, SNS 마케팅 효과는 업체에 돌아간다”고 했다. 음악 콘텐츠 스타트업 ‘스페이스 오디티’의 김홍기 대표는 “‘아이돌챔프’ ‘스타패스’ 같은 앱은 각종 프로그램과 시상식의 추가 투표권을 팬들로 하여금 이미 공공연하게 현금으로 거래하도록 하고 있다”면서 “충성심 비즈니스가 점점 시스템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 ‘투표 사업’의 등장… 신뢰 추락 빨간불

전문가들은 시청자, 국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행사, 프로그램에서 투표 기회 확대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악용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신뢰 추락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해외에도 타산지석이 있다. 영국의 ‘DJ 매그(Mag) 톱 100 DJ’다. 세계적인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월간지 ‘DJ 매그’는 세계 DJ 순위 집계 방식을 1997년 독자 투표로 전환했고, 인터넷과 SNS에 투표 열풍이 불었다. 연간 100만 건 이상의 투표가 몰리는, 세계 최대의 음악 투표가 됐다. 인기 DJ들은 DJ 매그에 ‘나를 뽑아달라’는 전면광고를 내기 시작했다. DJ와 팬들의 투표 독려 홍보와 광고는 SNS도 휩쓸었다. 이런 광풍은 EDM이 빌보드의 총아로 올라온 2000년대 후반에 절정에 달했다. 상업화·과열화된 투표에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대화 대중음악평론가는 “‘나에게 투표하라’는 DJ들의 광고가 한때 DJ 매그 전체 광고의 70∼80%를 차지했다. 하지만 홍보비와 SNS 팔로어가 많을수록 순위가 높아지는 현상이 자명해지자 순위의 위상이 급전직하했다. 이제는 EDM 입문자가 아니면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 천덕꾸러기가 됐다”고 했다. 이 평론가는 “투표가 활성화되면 매체의 수익구조, 예술가의 홍보에 좋아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공신력이 낮아져 되레 팬이 떠나고 매체도 공격받는다는 것을 보여준 예”라고 덧붙였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경연 프로그램은 재야에 묻힌 꿈나무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야 바람직하지만 현재는 최상위권만 살아남는 투표 올인 시스템에 천착한 탓에 참가자에게 선택, 배제, 차별에 따른 열패감을 안겨주는 구조”라면서 “연예기획사와 손을 잡은 방송사들이 투표 과열과 편법화 현상을 방치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임희윤 문화부 기자 imi@donga.com
#프로듀스x101 조작#실시간 투표#경연프로그램#아이돌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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