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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훼손한 여수 ‘진남관’ 복원 단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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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훼손한 여수 ‘진남관’ 복원 단서 찾았다

이형주 기자 입력 2019-09-02 03:00수정 2019-09-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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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바닥에서 불을 땐 흔적 발견… 좌우 익헌 위치와 구조 확인 기대
전면 발굴조사로 내부구조 밝혀질 듯
일제에 의해 훼손된 구국의 상징 진남관(왼쪽 사진)은 기울기 현상이 커져 2015년부터 해체·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달에 착수하는 진남관 부지 전면 발굴 조사를 통해 원형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여수시 제공
일제가 훼손한 국보 304호 진남관(鎭南館)의 원형 복원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는 단서가 발견됐다.

전남 여수시는 9월 안에 진남관 부지 748.39m²를 전면 발굴하는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1일 밝혔다. 발굴 작업은 진남관 부지를 50cm에서 1m 깊이로 파 성토 양상과 내부시설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여수시가 올해 2월부터 두 달간 진남관 부지의 일부를 파 조사한 결과, 좌측 바닥에서 불을 땐 흔적이 발견됐다. 김지선 여수시 문화예술과장은 “불을 땐 흔적이 아궁이 터일 가능성이 있어 진남관 구조를 정확하게 밝혀내기 위해 전면 발굴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여수시 군자동의 나지막한 언덕에 있는 진남관은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지방관아로서는 국내 최대 목조 단층건물이다. 부지 면적은 4939m²다. 진남관은 우리 민족의 고난과 극복의 역사를 보여준다. 진남관 주변은 고려 공민왕 때 왜구를 물리치면서 수군 중심지가 됐다. 조선시대인 1479년 지금의 해군함대사령부 격인 전라좌수영이 진남관 부지에 들어섰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전라좌수영 절도사로 부임해 진해루라는 누각에 머물며 전쟁에 나섰다. 진해루는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불탔으나 재란이 끝난 직후인 1599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75칸 규모의 객사인 진남관을 건립했다.

진남관은 왜구를 진압하고 평안한 남해를 만들기를 소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후 진남관은 1716년 이여옥 전라좌수사 근무 당시 불이 나 소실됐지만 2년 뒤 이제면 전라좌수사가 중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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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11년 조선의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전국 객사 건물을 개조해 공립보통학교를 세웠다. 교육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조선의 정신문화를 말살하고 식민지 교육을 위해 일본식으로 개조했다. 진남관도 일제의 훼손을 피하지 못하고 여수보통공립학교로 바뀌었다. 진남관 정원에는 일본 향나무가 심어졌다가 1990년대 벌목됐다. 진남관 정문 역할을 하던 2층 누각 망해루는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가 복원됐다. 김병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67)은 “진남관을 훼손한 것은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진남관은 이후 사람으로 치면 갈비뼈 기능을 하는 기둥 2개와 내부 벽이 제거되면서 넓은 마루 모양을 띠게 됐다. 기둥과 내부 벽이 없어지면서 진남관은 점차 기울어졌다. 기울기 현상이 심해지자 문화재청과 여수시는 2015년부터 예산 150억 원을 투입해 해체와 복원 작업을 벌이고 있다. 진남관을 해체한 결과 초석 70개, 목재자재 6000개, 기와 5만 장이 나왔고 복원 과정에 최대한 다시 사용할 방침이다.

문헌상에는 진남관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궐(闕)자를 새긴 위패인 궐패(闕牌)를 모신 정청(正廳)이, 좌우에는 중앙관리나 사신이 머물던 익헌(翼軒)이 있었다고 돼 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나 구조는 밝혀지지 않아 미궁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진남관 좌측 바닥에서 불을 땐 흔적이 나와 좌우 익헌 위치나 구조가 확인될 가능성이 커졌다. 전면 발굴조사를 통해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의 진남관 내부구조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권오봉 여수시장은 “호국충절의 고장으로서 여수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진남관의 성공적 원형 복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진남관#일제#국보 3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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