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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에 폭탄 던진 강우규 의사, 민족 교육에 평생 일군 재산 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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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에 폭탄 던진 강우규 의사, 민족 교육에 평생 일군 재산 희사

조종엽 기자 입력 2019-09-01 16:53수정 2019-09-0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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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의술을 잘 아시니까, 일 년에도 수천 원을 버시지만은 그 돈을 한 푼도 내게 주시지 아니하고 전부 학교에 기부하시면서,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나는 나 할 일이 있으니까’ 하십니다.”(동아일보 1920년 5월 4일자)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3대 조선총독에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아들이 옥중의 아버지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의 한 대목이다. 2일 의거 100주년을 맞아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일군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민족 교육 사업에 희사한 강 의사의 면모가 주목받고 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4일자

강 의사의 삶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1855년 평남 덕천군에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누나의 집에서 자랐다. 생계를 위해 한의학을 배운 뒤, 함남 홍원군에서 아들과 잡화상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논문 ‘한말 홍원지역 계몽운동 전개와 강우규의 현실인식’과 ‘강우규 의사 평전’(박환 지음·선인) 등을 통해 그의 삶을 살펴봤다.

강 의사가 민족의식에 눈을 뜬 건 함경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1935)를 만난 뒤로 보인다. 이동휘는 한국인의 정치활동이 봉쇄되자 대중 계몽운동을 펼쳤고, 이에 감화된 강 의사 역시 학교 설립에 나섰다. “홍원군 사립 영명학교는 임원 박치영 강찬구(姜燦九) 신영균 리기수 제씨가 열심 시무한 결과로 학도가 일진(日進)하여 70여 명에 달하였는데…”라는 대한매일신보(1909년 11월 24일자) 보도에서 강찬구가 강 의사다.

교육 사업은 만주에서도 이어졌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분개한 강 의사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1917년에는 중국 길림성 요하현에 신흥동(新興洞)을 개척했다. 유랑 중이던 동포를 끌어들여 마을에는 한두 해만에 100여 호가 자리를 잡았다. 1917년 봄 그는 신흥동에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돼 민족 교육에 전념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며 민족의식과 항일정신 고취에 앞장섰다고 한다. 한의업으로 번 수입은 거의 학교 운영에 투자했다. 신흥동은 나중에 러시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주민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벌인 그는 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결심했다. 그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자 자식들이 사식을 넣어주기 위해 일제의 감시 속에 친척 일가에게 돈을 빌리려 애쓰는 모습을 동아일보가 자세히 보도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평전에서 “강우규는 재력가였지만 돈을 모두 나라를 위한 일에 썼기 때문에 남겨진 가족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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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의사가 법정에서 설파한 ‘동양평화론’ 역시 새삼 주목된다. 그는 상고취지서에서 “동양 분쟁의 씨를 거두어 평화회의를 성립시켜야 한다. 그리고 동양 3국을 정립(鼎立)케 하여 견고히 자립한 후”라고 썼다. 또 “내가 죽은 뒤에라도 동양평화를 위하여 깊이 생각할지어다. 동양 즉 한중일 삼국이 정립한 동양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라. 내가 죽은 뒤에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독립신문 1920년 5월 6일자)고 말했다. 김형목 연구위원은 “일제의 고문과 회유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민족지도자, 선각자로서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는 2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 대강당에서 의거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

“만일 네가 내가 사형 받는 것을 슬퍼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면 나의 자식이 아니다.…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내가 이번에 죽으면 내가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강우규 의사를 면회한 아들이 전한 강 의사의 유언과 같은 말이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 기사 “강우규는 결국 사형, 작일(昨日) 오전 고등법원에서 마침내 상고를 기각하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유언은 강 의사가 얼마나 간절히 조선 청년의 교육을 염원했는지 그대로 전해준다.

기사는 또 “한평생 북조선 남만주로 돌아다니시면서…당신(강 의사)이 설립하신 학교가 여섯 군데요, 예수교회가 세 군데”라고 아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창간호(1920년 4월 1일자)에 실린 “강우규 공판은 금월 오일 개정” 기사를 시작으로 그해에만 19개의 기사를 통해 강 의사의 재판과 인생 역정을 집중 조명했다.

한기형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최근 저서 ‘식민지 문역’에서 동아일보의 강우규 의사 보도가 “식민지 내셔널리즘의 극적인 확산을 유도했다”고 설명했다. 강 의사가 법정에 등장하는 모습을 “강우규는…얼굴에는 여전히 붉으려한 화기를 가득히 띠었으며 위엄 있는 팔자수염을 쓰다듬으며 서서히 들어오더니….”(1920년 4월 15일자)으로 묘사한 것은 조선 대중에게 익숙한 중세 영웅전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는 분석이다.

“재등(사이토 총독)이는…동양평화를 깨트리는 사람이며 인도정의를 무시하는 자임으로 나는 죽이려 한 것이오.…검사의 말에 나를 매명한(賣名漢)이라 하나 나는 죽어도 매명한은 아니오. 인도정의와 동양평화와 조국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친 자요”라는 강 의사의 법정 선언도 “강의(剛毅·강직하여 굴하지 않음)한 최후의 일언, 강우규의 목적은 총독을 살해, 동양평화를 위하야 몸을 바침”(1920년 4월 16일자) 기사로 전했다.

옥바라지하는 아들의 동정에도 지면을 할애했다. 사형이 확정된 날 저녁 “부친의 사형결정을 듣고 치밀어 올라오는 효성과 진정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진정하지 못하던 강우규의 아들 강중건은 종로네거리에 나와서 하늘을 우러러 ‘주여 우리 민족도 모든 세계 각국에 있는 각 민족과 같이 행복 얻게 하여 주소서’ 기도를 하는 것을…”(1920년 5월 29일자 “종로에서 기도, 강우규의 아들이”)이라고 보도했다.

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위원은 논문에서 “동아일보사는 기획기사로 인간적인 강 의사의 생애를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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