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도 강연하고 밴드 보컬… 환자 맞춤형 일자리도 점점 늘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31일 03시 00분


코멘트

[‘스마트 시니어’ 시대] <5·끝> ‘노인 치매와의 공존’ 길 찾는 선진국

야마다 마유미 씨(오른쪽)가 6월 일본 마쓰사카시에서 열린 인지증 강연회에서 사회복지사인 기토 후미키 씨와 함게 인지증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마쓰사카=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야마다 마유미 씨(오른쪽)가 6월 일본 마쓰사카시에서 열린 인지증 강연회에서 사회복지사인 기토 후미키 씨와 함게 인지증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마쓰사카=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마쓰사카시 인지증(認知症) 시민강연회―인지증, 웃는 얼굴 그대로.’

일본에서는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뜻의 치매(癡呆) 대신 ‘인식하고 아는 것에 대한 증세’라는 뜻의 인지증(認知症)이라는 단어를 쓴다. 6월 23일 일본 미에현 마쓰사카시 산업진흥센터에서도 이처럼 인지증을 제목으로 한 강연이 진행됐다. 좌석 200석 대부분을 차지한 이들은 은발 노인이었다. 인구 10만 명 남짓한 마쓰사카시에서는 매년 시청 주관으로 인지증 관련 강연이 열린다. 이날 강사인 야마다 마유미 씨(59)가 주변의 부축을 받고 강단에 올랐다. 그는 8년 전 알츠하이머(치매를 일으키는 퇴행성 뇌질환) 진단을 받았다.

이날 강연은 나고야에 거주하는 야마다 씨와 기토 후미키 씨가 공동으로 진행했다. 기토 씨는 나고야시 치매지원상담센터의 사회복지사다. 강연은 기토 씨가 묻고 야마다 씨가 답하는 형식이었다. 현재 야마다 씨는 단기기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글 읽기나 쓰기부터 요리 등 일상 활동이 어렵다. 특히 공간인지 능력이 많이 저하됐다. 강연에서는 야마다 씨가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거나, 셔츠를 입는 데 4∼5시간이 걸릴 만큼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 영상과 사진으로 소개됐다.

그는 이날 인지증을 처음 알아차리게 됐던 상황, 주변의 도움이 어떻게 생활을 바꾸는지에 대해 담담히 얘기했다. 스마트폰 음성인식 서비스로 일상생활을 하는 모습도 전했다. 기토 씨는 “인지증 진단을 받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해다. 증상은 제각각이며 야마다 씨의 경우 장기 기억 능력은 좋은 편”이라고 전했다.

야마다 씨는 “51세에 처음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많이 울었지만 지금 잘 지내고 있다”며 “인지증은 불가능한 것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숨기는 것보단 주변에 도움을 구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고 덧붙였다.

○ “2025년 노인 5명 중 1명은 인지증”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인지증 인구는 65세 이상 노인의 15%인 462만 명을 기록했고, 2025년이면 20%에 달하는 700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인지증 초기 단계인 경도인지장애(MCI) 500만 명을 더하면 2025년경 노인 4명 중 1명은 인지증과 관련한 장애를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인지증 환자 증가에 대한 대처는 일본의 고령화에서 중요한 과제로 여겨져 왔다. 일본에선 최근 그 대안으로 인지증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시도되고 있다.


인지증 환자가 직접 강연에 나서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인지증 관련 출판물 및 영상 제작업체인 하루노소라의 오자키 준로 대표는 “과거에는 의사의 조언이나 인지증 환자 가족 체험담을 담은 출판물이나 강연이 주를 이뤘다”며 “최근 4∼5년 사이 인지증 당사자의 사회활동, 강연 및 행사 등이 늘고 있으며 수요도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지증에 걸린 당사자가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야마다 씨는 강연 후 기자와 만나 “인지증 진단을 받고 절망에 빠졌을 때 인지증에도 활발히 활동하는 이들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며 “(나도)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을 들은 70대의 마키노 슈이치 씨는 “주변에서 인지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늘고 있다. 당사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 “인지증이라도 좋다”


곤도 히데요 씨(67) 역시 세상에 목소리를 내고 활발히 접촉면을 늘려 가는 알츠하이머 환자다. 10년 전 인지증 진단을 받은 그는 2017년부터 포크듀오 ‘히데2’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곤도 씨는 다른 멤버인 이나다 히데키 씨(58)와 인터뷰 중 자신이 젊은 시절 즐겨 부른 1970년대 노래를 열창할 만큼 흥이 넘쳤다.

곤도 히데요 씨(가운데)가 이달 초 열린 포크듀오 ‘히데2’의 앨범 발매 콘서트에서 공연을 열고 있다. 10년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그는 2017년 인지증 관련 NPO 단체를 운영하는 이나다 히데키 씨(오른쪽)와 히데2를 결성했다. 이나다 히데키 씨 제공
곤도 히데요 씨(가운데)가 이달 초 열린 포크듀오 ‘히데2’의 앨범 발매 콘서트에서 공연을 열고 있다. 10년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그는 2017년 인지증 관련 NPO 단체를 운영하는 이나다 히데키 씨(오른쪽)와 히데2를 결성했다. 이나다 히데키 씨 제공
화학기기 회사 영업사원이던 그는 히데2에서 처음 밴드를 하게 됐다. 이나다 씨가 대표로 있는 인지증 관련 비영리단체(NPO) 행사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기타 연주 제안에 “까짓것 밴드나 해볼까”라고 말한 게 그 시작이었다. 이나다 씨조차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고 했다. 두 사람은 2017년 30여 차례 무대에 섰고, 지난해 50여 차례…. 올해는 그 횟수가 더 늘어났다.

곤도 씨는 1시간 전에 인터뷰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인지증이 진행된 상태다. 공연에서도 종종 밴드 이름을 잊는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는 “그동안 어떤 공연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공연에서의 즐거운 느낌은 남아 있다”고 했다. 2년간 밴드 활동을 하며 ‘할 수 있는 것’도 생겼다. 곤도 씨의 아내는 “과거엔 옆에서 손가락으로 직접 악보를 짚어 줘야 그 부분을 연주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악보 없이 연주가 가능해졌다”고 귀띔했다.

올해 들어 곤도 씨는 히데2 외에 동네 주민들과 결성한 새로운 밴드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달 초엔 첫 앨범도 냈다. 그는 “처음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병을 계기로, 나를 돕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삶이 풍요로워졌다. 그래서 지금이 좋다”고 했다.

○ 사회가 함께 돌보는 인지증 환자


인지증 환자를 존중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참여시키는 분위기는 일본 중앙정부와 지자체와 비영리단체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과거에는 요양원이나 병원 같은 시설 확충 중심이었다. 이젠 방향이 달라졌다. 일본 정부는 후생노동성 차원의 인지증 정책인 오렌지플랜에 이어 2015년 국가 전략 차원으로 ‘신오렌지플랜’을 내걸고 인지증 환자의 사회적 공존, 전사회적 지원 방안을 확대했다. 인지증 친화적 지역사회(dementia-friendly community) 조성도 그중 하나다. 초기 단계 인지증을 집중 지원해 중증 진행을 예방하고, 인지증 정도에 따른 맞춤형 의료 및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학교와 지역커뮤니티, 공무원 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하는 인지증 서포터도 양성 중이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인지증 서포터는 지난해 말 기준 1100만 명이 넘었다. 일본 관공서 등에서는 인지증 서포터를 뜻하는 오렌지색 링을 팔에 차거나 목에 걸고 있는 사람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인지증을 앓는 노인의 활동 영역도 점차 넓어지는 추세다. 기존엔 돌봄 서비스를 받으며 종이접기나 노래 부르기 같은 정적인 활동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면, 최근 실제 노동에 참여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도쿄도 마치다시의 혼다자동차 영업국에서는 2년 전부터 매일 아침 인지증 관련 NPO ‘데이즈BLG’ 소속 60, 70대 노인들이 출근해 중고차를 세차한다. 인지증 노인들은 직접 몸을 쓰며 일하는 보람과 자신감을 얻는다. 영업소의 고바야시 에이사쿠 주임은 “처음에는 이분들에게 어떻게 세차를 맡기냐는 등 영업소 내부 반대가 많았지만 이분들이 더 성실하다”고 전했다. 마치다 영업소의 실험이 좋은 반응을 얻자 일본 내 다른 혼다 영업소에서도 인지증 노인 세차 일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원이나 놀이터 청소에 참여하거나 배달하는 일자리도 늘어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속적으로 인지증에 대한 전 사회적 대응을 강화 중이다. 지난해 12월부터는 인지증과 관련해 기존 관계부처 실무자급이 진행했던 회의가 장관급 회의로 격상했다. 신오렌지플랜에 이어 6월에는 인지증 관련 사회적 투자를 확대하는 새로운 인지증 시책인 ‘인지증시책추진대강’을 내놨다. 은행·보험사 및 금융기관, 마트, 버스·택시 운수업체 등 민간기업들도 인지증 환자 지원에 참여할 방침이다. 후생노동성 인지증시책추진실의 리 사토 사무관은 “(인지증) 정책 기본 목표는 (사회적) 공생과 예방”이라며 “인지증 당사자와 가족의 눈높이를 중시하고,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데 중점을 둔다”고 전했다.

마쓰사카·가마쿠라·도쿄=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일본#노인#치매#인지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