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는 ‘Against Empathy(공감에 반대하며)’다. 공감에 반대한다는 게 말이 되나? 타인에게 공감하는 덕에 사람은 고통을 겪거나 불행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데 말이다. 혹자는 “악은 공감의 침식(侵蝕)”이라고도 주장한다.
보통 ‘공감’이라는 단어는 “배려하고,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능력”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물론 이런 능력에 저자가 반대하는 건 아니다.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공감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도덕적 행동이 공감에만 의존할 때 생기는 부작용을 지적한다.
첫 번째 문제는 공감이 ‘스포트라이트’와 같아서 조명받지 못한 이들의 고통과 불행을 가려 버린다는 데 있다. 저자는 2012년 미국 코네티컷주 뉴타운의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총기난사로 아이 20명이 살해당하자, 전 미국이 슬픔에 빠졌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해 시카고(범죄율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에서 살해당한 아동들은 이 사건 피해자보다 수가 더 많지만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한 실험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불치병에 걸린 아이들이 고통을 덜어주는 치료를 기다리고 있다는 상황을 설정한 실험이었다. 특정 소녀에게 공감을 유도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소녀의 치료를 앞당겨야 한다고 답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만큼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걸 인식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더구나 공감이라는 스포트라이트의 기준은 사람의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다. 백인은 흑인보다 백인의 입장에 공감하기 쉽다. 다른 공동체의 고통은 관심 밖의 일이 된다. 그 결과 수단 다르푸르에서 벌어진 학살보다 한 미국인 학생이 휴가 중 실종된 사건을 TV에서 더 많이 보도한다. 미국에서 교도소의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렇게 당해도 싼’ 이들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기부 프로그램의 연출자들이 외모가 반듯한 출연자를 선호한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다.
끔찍한 전쟁에 뛰어드는 일도 공감에 혐의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본인이 속한 공동체 속 소수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정이 다수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공감에 바탕을 둔 행동은 ‘패거리 짓기’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도덕, 연민, 친절, 사랑, 선량함, 정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감에 의존하는 건 잘못됐으며 이성적 판단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을 모색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효율적 이타주의’다.
하지만 공감만큼 사람을 열정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동인(動因)이 또 있을까 싶다. 무분별한 감정 이입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주장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저자 말마따나 제목을 ‘Against the Misapplication of Empathy(공감의 오용에 반대하며)’라고 짓는 게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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