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의 사과[횡설수설/우경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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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미상 폐손상 질환.’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 물질로 인한 폐질환의 첫 진단명이다. 2011년 4월 서울아산병원에 20, 30대 임산부 등 8명이 이 진단명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폐가 딱딱하게 굳는 섬유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돼 급성호흡부전을 겪다가 4명이 사망했다. 도통 원인을 알 수 없던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의료진은 신종 감염병을 의심했고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에 나섰다. 이들의 예리한 진단과 정직한 신고가 없었다면 ‘원인 미상’인 억울한 죽음이 계속됐을 것이다.

▷그해 8월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 살균제와의 인과관계가 의심된다고 발표했고 11월 살균 효과를 지닌 화학물질의 독성이 잠정 확인됐다. 17년간 가습기 살균제 998만 개가 팔린 뒤였다. 현재 공식적인 피해신고자는 6309명, 전체 사용자의 1% 수준으로 추정된다. 원인은 밝혀졌으나 피해자와 그 가족은 길고 긴 고통의 터널로 들어섰다. 2011년 3월 결혼 9년 만에 어렵게 첫딸을 얻은 정모 씨는 3개월 뒤 아내를 잃었다. 임신으로 배가 불러 숨이 가쁜 줄만 알았지 건강을 위해 가습기 살균제를 꼼꼼히 챙겨 쓴 것이 비극을 낳을 줄이야. 가족을 잃은 슬픔, 내 손으로 가습기를 틀어줬다는 죄책감에 정상적인 삶을 꾸릴 수 없었다. 가습기 사용이 잦은 임산부나 영·유아 피해가 커서 가정이 해체된 경우가 많다.

▷사회적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피부에는 안전한 화학물질이 흡입하면 독성물질이 된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기업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기업에서 돈을 받은 교수는 유해성 실험을 버젓이 조작했다. 공산품으로 분류돼 안전성을 검증하는 체계도 미비했다. 그 사실은 되레 정부에 면죄부를 줬다. ‘살균 99.9%’라는 광고를 믿고 구입했던 피해자들은 기업과 정부가 책임을 미루는 상황에서 법적 다툼에도 연이어 패소하며 절망에 빠져들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따르면 피해자와 가족들의 66.3%가 지속적인 울분을 경험했고, 27.6%가 자살을 생각했다.

▷8년이 지난 27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청문회. 이 원료를 제조한 SK케미칼 최창원 전 대표이사와 제품을 만든 애경산업 채동석 부회장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휠체어를 타고 이를 지켜보던 피해자들 사이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2년 전에야 피해구제 특별법이 시행됐고, 이제야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거론한다. 원인 규명도, 사과도, 법적 처벌과 보상도 지연되며 무력하고 아팠을 이들에게 너무 늦지 않는 사과이기를.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가습기 살균제#sk케미칼#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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