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매운동의 끝은[오늘과 내일/김광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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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청년 유탄 맞지 않게 해야… 민간차원 교류 늘리는 게 양국에 도움

김광현 논설위원
김광현 논설위원
지난 주말 동네 일본 라멘 가게의 입간판 표지가 바뀌어 있었다. 매직펜으로 서툴게 ‘한국’이라고 쓰고 태극기 문양까지 그려 넣은 A4용지로 ‘일본 라멘’의 일본 글자를 가려 ‘한국 라멘’으로 만들었다. 가게 안에서 파는 메뉴는 똑같은데 하루아침에 라멘의 국적이 바뀐 것이다. 그래도 저녁 시간에 손님이 없어 젊은 종업원들이 빈 식탁만 닦고 있었다.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거세다. 불량 부정제품에 대한 소비자 불매운동과는 다른 차원이다. 이달 중순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79.2%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 도쿄 오사카 오키나와 후쿠오카 등 4개 지역의 7월 카드 매출액이 6월에 비해 20% 정도 감소했다. 단체관광 예약 취소가 줄을 잇는 것으로 봐서 8월 매출은 이보다 더 많이 줄 것이다. 수입맥주 가운데 부동의 1위였던 아사히가 칭타오, 하이네켄 등에 밀려났다.

일본에서 한국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신문 방송에서 한국 상품과 여행에 대한 불매운동 보도도 거의 없다. 한일 갈등이 불거진 뒤 열린 방탄소년단의 일본 오사카 시즈오카 순회공연은 공연마다 수만 명의 일본 팬이 몰려 난리가 났고, 음반 판매도 1위를 달렸다. 하지만 앞으로 사태 추이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과거 일왕 사죄 요구 등 몇 차례 갈등이 불거졌을 때 단체관광이 일제히 취소됐고 한류 바람이 급속히 식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화이트리스트 배제 적용 등으로 한일 갈등이 심화되고 불매운동은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 불매운동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그 결과는 어떨까.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최근 한일 무역분쟁이 일본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겠지만 한국에 비해선 작은 정도라고 분석했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제조업 타격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췄다.

불매운동의 상징처럼 된 유니클로의 매출이 이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해외시장에서 제조해 여기에 납품하는 한국의 의류공장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매장 점원들은 실직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다음 달 코엑스에서 열 예정이던 해외취업박람회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불매운동이 일고 있는 와중에 일본 기업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를 진행하기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다. 일본 취업의 꿈에 부풀어 있던 청년들이 유탄을 맞은 셈이다.

가슴이 뜨거운 것은 좋으나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안 된다. 머리를 더 뜨겁게 부채질하는 정치적 선동에 넘어가면 안 된다. 이들은 사태가 악화돼도 직접적으로 피해 볼 게 없는 사람들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동 한복판에 ‘노 저팬’ 현수막을 내건 구청장과 그 현수막을 끌어내린 지역 상인들이 그 사실을 웅변한다.

한국은 이미 경제 규모 세계 11위, 1인당 소득 3만 달러로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 해외 원조 받던 세계 최빈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는 미국은 물론 일본과의 기술 협력, 상품 교역이 큰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미일에도 큰 이득이 된 것은 물론이다.

지금은 일제하 물산장려운동, 인도의 스와데시(영국 상품 불매운동)를 벌이던 식민지 시대가 더 이상 아니다. 오히려 상대국에서 한국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면 ‘유치하고 시대착오적인 운동을 그만두라’고 촉구해야 할 때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사태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어도 민간 차원에서는 거기에 휘말리지 말고 여행이든 상품이든 문화공연이든 더 활발히 교류하고 협력하자는 제안은 어떨까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일본 불매운동#지소미아 파기#화이트리스트 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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