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한계 극복의 역사[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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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교수 그림
세상에 절대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할까? 한계는 상대적일까, 아니면 절대적일까?

아르메니아공화국의 전파연구소에서 연구할 때다. 코카서스산 정상에 있는 전파관측소에 올라가야 했다. 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속이 불편하고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동료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내려왔다. 안정을 취하고 다시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는 이 증상이 고산병인 줄 몰랐다.

두 번째 고통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프랑스로 넘어가는 피레네 산맥에서 경험했다. 차를 세우고 동료에게 운전대를 넘겨줬다. 높이는 정확히 2000m였다. 서른 초반이었다. 나의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절대적 육체적 정신적 한계가 존재함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 전엔 뭔가 노력하면 다 가능할 것이라 믿었고 꿈을 가지고 부단히 인내하고 기다리면 언젠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반도체의 역사는 한계 극복의 역사다. 정복할 수 없는 정상의 높이를 경신하는 것처럼. 1970년 메모리 반도체는 회로 폭 10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에 1KB(킬로바이트) 용량이었으나, 지금은 회로 폭 1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에 8GB(기가바이트) 용량의 제품도 나온다. 크기는 1만분의 1로 줄었고 용량은 800만 배로 늘었다. 이 발전 속도는 ‘양자 한계’로 인해 더뎌지고 있지만 한계에 봉착한 것은 아니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반도체 용량을 더 늘리기 위해서는 선폭을 줄이는 미세화 작업이 필요하다. 선폭을 줄이면 줄일수록 전자의 이동 거리가 짧아져 동작 속도가 빨라지고 소비전력이 줄어든다. 하지만 선폭이 10nm인 공정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마스크와 감광제, 광학계 등 노광 공정 전 영역에 걸쳐 신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시간, 비용,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최근 물리학자들은 1nm의 10분의 1인 옹스트롬(Å·1Å은 100억분의 1m) 스케일로 뛰어들었다. 원자의 크기는 0.1nm로 1Å이다. 원자 사이에 틈을 만들어 빛을 모으거나 통과시키는 기술을 개발했다. 10nm 공정의 문제를 극복하는 게 핵심인 현실에서 너무 앞선 일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반도체가 달려온 가속도를 생각하면 그렇게 빠른 일은 아니다.

최근 스위스의 융프라우요흐에 다녀왔다. 이곳엔 유럽에서 제일 높은 철도역이 있다. 무려 고도 3454m. 괜찮겠지 하고 방심하고 올라간 나는 머리를 죄는 통증에 후회하며 만년설로 뒤덮인 몽블랑을 눈앞에 두고도 내려가는 기차가 언제 올까만을 생각했다.

노력과 실패, 도전과 재도전, 이런 삶의 일상적 움직임은 산 아래 마을의 이야기처럼 여유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다. 10nm 이하 반도체 공정의 어려움에 대한 지금의 이야기는 양자 한계가 만든 엄격한 높이에 비한다면 아마도 산 아래 마을 입구에서 웅성대는 이야기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육체적 정신적 한계#양자 한계#반도체#스위스 융프라우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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