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칼럼]광복절, 바닷물도 춤을 춘 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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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메이지 유신 계기로 서구 제도와 기술 적극 수용한 日
대학서 기술인재 키우며 국력 길러
지금 우리는 日을 얼마나 알고 있나… ‘지피지기 백전불태’ 옛 교훈 새겨야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광복, 그 기쁨이 오죽했으면 “바닷물도 춤을 춘다”고 노래했을까. 이미 74년 전이니 긴 세월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년 광복절이 새로운 것은, 최근에 벌어진 일본과의 경제전쟁 때문이다. 전쟁이란 물론 군사적 다툼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국가 간에 서로 분업 체계를 갖춘 상황에서 특정 제품의 수출을 대한민국에 대해서만 통제한다면 그 역시 전쟁에 버금가는 일이다. 여하튼 전쟁은 정치 지도자들의 결심으로 시작되지만 승패에 상관없이 고초는 모두 국민들 몫이다.

그렇기에 싸우지 않는 것이 최상책인데, 그러나 이를 피할 수 없다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새겨야 할 가장 큰 교훈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다.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는 없는지, 혹은 상대의 능력을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닌지 냉철하고 치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정신력과 투지는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력이며 특히 경제전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서구 사회제도와 공업기술을 받아들이며 부국강병을 꾀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새로운 제국을 이끌 인재 양성에 진력했고 이를 위해 1877년 도쿄제국대를 필두로 7개의 제국대를 설립했다. 패전 후 대학 이름에서 제국이란 명칭이 사라진 지 이미 70년이 넘었지만,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구제대(舊帝大)라 불리며 일본을 이끌고 있다. 일본의 많은 국립대는 모두 학장이 지휘하지만 이 7개 대학만은 그 역할을 총장이 맡고 있다.

1897년 교토에 두 번째 제국대가 만들어지기까지 도쿄제국대 명칭은 그냥 제국대학이었고, 그 목적은 철저히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인재 양성이었다. 그렇기에 초기의 제국대 졸업생은 전공에 관계없이 거의 모두 정부의 고급 관료로 바로 임용됐다. 그런 제도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예를 들어 구제대의 공대 전기공학과나 기계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학생들은 많은 경우 관료의 길을 걷는다.

제국대는 당시의 유럽을 모방했다. 19세기 초 프랑스를 세계 무대에 끌어올린 나폴레옹은 국가 발전에 꼭 필요한 인재군으로 군인, 관료 그리고 엔지니어를 꼽았다. 그리고 이들을 육성하기 위해 에콜 밀리테르, 에콜 노르말 그리고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집중 지원했다. 이 시스템을 본받아 제국대는 법대, 의대, 문과대, 이과대와 더불어 1877년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었던 공과대를 설치해 다섯 개 단과대학으로 시작했다. 같은 무렵 조선에서는 변함없이 성리학을 가르치며 젊은이들을 선비로 키우고 있었고, 그 결과 우리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제국대의 맥을 잇고 있는 현재의 국립 도쿄대는 일본 사회에서 그야말로 대학 중의 대학이다. 이 대학 정문에 들어서면 100년도 더 됐을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줄 서 있는, 그래서 저절로 전통과 역사의 힘이 느껴지는 길을 걷게 된다. 일본의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계절에 관계없이 단체로 견학 와서 걷는 길, 그리고 일본의 지도자를 꿈꾸는 젊은 대학생들이 매일 걷는 길이다.

그런데 이 길에서는 아직도 ‘帝大(제대)’ 혹은 ‘東京帝國大學(도쿄제국대학)’을 돋움 글씨로 선명히 드러내고 있는 상하수도 무쇠 맨홀 뚜껑을 여럿 볼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여기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도 않지만 필자에게는 제국이 조금 섬뜩하게 다가왔다. 주변 국가를 압제하고 수탈한 제국을 일본이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미래 세대를 기르는 대학에서는 그 흔적을 지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오래된 물건도 멀쩡하면 쓸고 닦아 계속 사용하는 일본인들의 좋은 생활습관일 수도 있고, 또 대학의 엄연한 역사이기에 그냥 두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우리나라나 일본은 모두 다양한 사회다. 일본 국민 중 극히 일부는 심지어 제국을 돌아가고 싶은 영광의 시대로 여기기도 하겠지만, 그 반대로 이를 반성하며 특히 우호적인 한일(韓日) 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이웃과의 다툼은 모두의 불행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일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좋건 싫건 한국과 일본은 영원한 이웃이다.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광복절#일본#지피지기 백전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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