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 1693년 1차 渡日, 단순납치 아닌 납치유도 가능성”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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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도일 밀사설’ 최영성 교수 새 주장
日, 표류민에 지나치게 융숭한 대접… 막부로 보낸 ‘서류 3통’-관대 등도
예사 어부로 보기 어려워… 돗토리 체류 중에도 다녀왔을 수도

조선 중기 노비 신분의 한 어부가 있었다. 외국어를 잘한 그는 우연히 외국으로 잡혀갔다가 큰 섬이 조선의 영토라고 강력히 주장해 외국 정부의 공식 문서를 받아냈다. ‘드라마틱하지만 개연성은 떨어지는 듯한’ 이 이야기는 숙종 때 실존인물인 안용복(1658?∼?)의 행적이다. 혹시 숨은 배경은 없는 걸까.

안용복의 1696년 2차 도일(渡日)이 소론(少論) 정권의 밀사 파견이었다는 설을 내놨던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1693년 1차 도일의 성격에 관해 새로운 주장을 했다. 최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울릉도 쟁계(爭界)를 촉발한 안용복의 1차 도일은 일본 어민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 아니라 안용복이 고의로 납치를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먼저 1차 도일 당시 일본의 대응이 자연스럽지가 않다고 했다. 일본은 안용복을 수인(囚人)으로 취급하다가 나중에는 표류민(漂流民)으로 대우했는데, 그 대우가 지나치게 융숭했다는 것.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요나고에서 조선인의 구서(口書·진술서) 및 (저들이) 소지하고 있던 서(書) 3통, 작은 칼(小刀) 1본을 에도에 보냈다.”

안용복이 머무르던 돗토리번(鳥取藩)의 공식 일지인 ‘공장(控帳)’의 1693년 4월 30일 기록이다. 진술서와 함께 에도 막부에 파발을 띄워 보낼 정도로 중요한 ‘서(書) 3통’을 왜 우연히 납치된 어부가 갖고 있었을까. ‘서 3통’에 관해 또 다른 일본 사료인 ‘어용인일기(御用人日記)’에서는 ‘품속에 간직한 서부 3통’(懷中之書付三通)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서 3통’이 울릉도 관련 내용인지, 조정의 인물이 일본에 보내는 서한인지, 신원보증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1차 도일이 단순 납치가 아니었음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라고 말했다.

안용복 일행의 소지품도 심상치가 않다. 최 교수는 안용복과 함께 납치당한 박어둔이 챙긴 ‘보따리’는 중요한 물건을 쌀 때 쓰는 ‘비단 보자기’로 번역하는 게 옳다고 봤다. 갓(笠), 실띠(打帶)도 있었는데, 실띠는 사대부가 정장을 할 때 쓰는 관대(冠帶)라는 것. 반면 어렵 도구는 갈고리 하나뿐이었다. 최 교수는 “소지품도 안용복 일행이 예사 어부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돗토리번사’ 등에는 안용복이 납치되기 한 해 전인 1692년에도 전복을 따던 조선인과 일본인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충돌하면서 대화한 기록이 나온다. 최 교수는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이 1년 간격으로 울릉도에서 조우했고, 조선 어부들 가운데 일본어를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라며 “안용복이 1692년부터 울릉도를 통해 도일할 기회를 엿봤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안용복이 에도에 실제 갔는지에 대한 논쟁에 관해서는 “납치와 직접 관련된 오오야 가문의 고문서에 일행의 에도행이 기록돼 있고, ‘죽도기사’ 9월 4일자에 실린 ‘조선인구상서(朝鮮人口上書)’에는 일행이 ‘34일간 돗토리에 체류했다’고 써 있다”며 “이 기간에 안용복이 은밀하게 에도에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차도일 밀사설#안용복#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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