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경제보복’에 전범기업 투자 어떻게 하나…고민 깊은 국민연금

  • 뉴시스
  • 입력 2019년 8월 8일 05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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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미쓰비시 등 75개 전범기업에 1.2조 투자
국회 전범기업 투자금지 '한목소리'…법안 발의
정부 "법률제한 신중"…책임투자원칙부터 수립
내달 기금위서 책임투자 가이드라인 논의할 듯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조치를 발표한 이후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하면서 국민연금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국민이 낸 보험료로 매년 1조원 가량을 일본 전범기업에 투자하는 건 사회적 책임 투자 관점에 어긋난다는 비판에 직면해서다.

국회에선 국민연금의 전범기업 투자를 금지하는 법안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 당국은 특정 기업에 대한 투자를 법으로 금지하기보다 책임투자 원칙을 정하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그 원칙을 다룰 다음달 최고 의사결정기구에서도 전범기업 논의는 제외키로 했다.

◇日전범기업에 지난해 1.2조 투자…여야 막론 비판


지난해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의 일본 전범기업 투자평가액은 1조2300억원이다.

여기서 전범기업은 2012년 당시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확인한 299개 기업이다. 국민연금은 이 중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배상 판결을 확정한 미쓰비시를 포함, 75개 기업에 투자했다.

국민연금의 전범기업 투자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4년 7600억원이었던 전범기업 투자 규모는 2015년 9300억원에 이어 2016년 1조1900억원으로 1조원대를 넘어섰고 2017년엔 1조5500억원까지 증가했다.

지난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법안심사소위원회와 국민연금공단 국정감사 등에서도 일본 전범기업 투자 적정성 논란이 가습기살균제 가해 기업 등과 함께 불거진 바 있다. 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 정서에 반하는 전범기업 투자를 놓고 정부에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민주평화당 김광수 의원은 이들 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국민연금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투자 시 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을 고려토록 한 법 102조 제4항에 공식사과 및 피해배상을 하지 않은 전범기업 등을 투자 제한 대상으로 정하는 게 골자다.

◇정부 “취지 공감하지만”…법률 통한 제한엔 ‘신중’


정부도 이런 법 취지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투자를 제한하는 방식과 절차의 문제라는 입장이다.

국민연금은 해외주식에 투자할 때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가 부여하는 수익률 평가 기준(벤치마크 지수)에 따라 투자하고 있다. 일본 투자도 마찬가지다. 투자 금액이 늘어난 것도 전체 기금의 해외주식 투자 규모가 늘어난 만큼 비례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건복지부 등은 수익성과 안정성 등을 고려해야 결정하는 투자 대상을 법으로 제한한 사례가 해외 연기금에서 없었을뿐더러 국가 간 분쟁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신중한 입장을 표했다. 실제 특정 산업이나 기업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네거티브 스크리닝)하는 네덜란드,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등 연기금은 지침으로 제한 대상을 정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변수가 생겼다. 정부가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 수탁자 책임 원칙)를 도입하면서 설치한 수탁자 책임 전문위원회에서 전범기업 투자 제한 검토 필요성을 제시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위원회 산하 책임투자분과 위원들은 포괄적인 책임투자 원칙 정립을 전제 조건으로 장기 지속가능성과 무관하게 한국적 특수상황을 고려, 책임투자 원칙을 수립한다면 전범기업 투자 제한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9월 사회적 책임투자 원칙만 결정…“전범기업 논의 계속”


그렇다고 일본 전범기업 투자 금지가 바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책임투자분과 논의대로 사회적 책임투자 원칙 정립이 먼저라는 게 정부 입장이다. 해외 연기금과 달리 국민연금은 현재 책임투자 관련 정책이나 지침 등이 전무한 상태다.

일각에서 정부가 다음달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전범기업 투자 제한을 추진한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것과 관련, 복지부는 “9월 중 기금위에서는 일본 전범기업 투자 금지 문제를 제외한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 및 가이드라인(그 외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 등)을 논의한 후 의결할 예정”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음달 열릴 기금위에선 책임투자 대상 자산군, 책임투자 전략, 위탁 규모 등을 논의하고 구체적인 책임투자 원칙 및 담당 조직 역량 강화 방안 마련을 추진키로 했다.

가이드라인이 나오더라도 고민은 계속된다. 전범기업을 어느 측면에서 사회적 책임 위반 사례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해외 연기금을 보면 네덜란드(APG)는 무기제조, 대인지뢰, 화학 및 생물무기 생산기업, 사회적 책임 관련 규약인 유엔 글로벌콤팩트 등에 위배되는 기업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 노르웨이(NBIM)는 중대한 인권침해(아동·강제노동, 자유박탈 등) 여부, 전쟁이나 분쟁상황에서 개인 권리 침해, 기후변화, 윤리적 규범 위배 여부 등을 검토한다.

복지부는 향후 전범기업 투자 금지가 기금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 국가 간 분쟁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책임투자분과위원회 추가 논의, 관련 전문가 의견 수렴 등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세종=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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