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부자가 배우는 경제]1500년대 ‘유럽 최고의 부자’ 푸거, 초기 자본주의의 문을 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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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푸거의 초상화. 푸거는 성공한 기업인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오른쪽 사진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푸거라이의 현재 모습. 푸거는 정원이 딸린 4채의 가옥과 토지를 매입하고 1516년부터 푸거라이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부키 제공
야코프 푸거의 초상화. 푸거는 성공한 기업인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오른쪽 사진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푸거라이의 현재 모습. 푸거는 정원이 딸린 4채의 가옥과 토지를 매입하고 1516년부터 푸거라이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부키 제공
야코프 푸거(Jacob Fugger)는 1500년을 전후해 유럽에서 최고 부자가 된 인물입니다. 평민으로 태어나 직물업과 향료무역, 광산업, 금융업 등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이 자본을 지키기 위해 당시의 정치·종교 권력과 끊임없이 거래했습니다. 오늘은 푸거가 재산을 모은 과정과 그의 활동이 초기 자본주의 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푸거의 성장과 부의 축적


푸거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상업에 종사하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유년 시절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떠난 푸거는 복식부기와 금융업, 무역 등을 배웠습니다. 19세에 아우크스부르크로 돌아온 뒤 형제들과 함께 직물업과 향신료 무역을 중심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26세부터는 광산 경영과 은행업에도 뛰어들어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의 재산은 당시 유럽 내 총생산량의 약 2%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 광산 경영과 노동자의 희생


푸거는 광산을 경영하며 가장 많은 부를 쌓았습니다. 푸거는 오스트리아의 슈바츠와 티롤 지방, 헝가리 등에서 금과 은, 구리, 주석 광산을 경영했습니다. 광산에서는 연간 100kg의 금과 10t의 은이 생산됐습니다. 이는 당시 전 세계 금의 33%, 유럽 은의 25%를 차지하는 양이었습니다. 구리와 주석은 유럽에서 화폐 주조용으로 사용됐습니다. 푸거는 신대륙의 광산 개발이 본격화되기 전 유럽의 최대 광산 경영자였고, 푸거의 광산 개발 기술은 신대륙 광산 개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광산 노동자는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을 합니다. 광부들은 곡괭이와 망치 등을 사용해 지하 150m 갱도 벽을 깎아냈습니다. 통로를 밝히는 동물성 램프 때문에 갱도 안은 악취와 연기로 가득했습니다. 광부들은 폐병과 위궤양에 시달렸습니다. 갱도가 무너져 내리거나 갑자기 물이 차면 많은 광부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광부들은 임금 인상과 유급 휴가, 하루 8시간 노동 등을 요구했지만, 푸거는 선동자를 처형하거나 추방했고 임금을 삭감했습니다.

○ 은행업의 합법화 과정


푸거가 살았던 시대에 은행업은 불법이었습니다. 교회와 당시 지식인들이 성경 구절을 근거로 은행업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행의 주 업무는 빌린 돈에 이자를 물리는 것인데, 성경 누가복음 6장 35절에서는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단테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은 은행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살인자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양심적으로 높은 이자를 물리는 고리대금뿐 아니라 조금의 이자를 받는 일도 허용되지 않았고, 기독교인은 은행업에 뛰어들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유럽 경제가 활성화하면서 은행업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산업이 됐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은행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대표적으로 메디치 가문은 은행업으로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16세기 독일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은행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푸거가 있었습니다. 당시 피르크하이머 등 독일의 지식인들은 푸거를 비난했지만, 교회의 묵인 아래 은행업은 합법이 됐습니다. 푸거는 합법화 과정에서 뛰어난 사업가적 재능을 발휘했고, 은행업의 합법화는 초기 자본주의 확립에 중요한 밑바탕이 됐습니다.

○ 자본 축적과 정치권력의 연결


푸거는 돈이 있으면 황제마저도 굽실거린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재산을 축적한 뒤 정치·종교 권력과 거래를 했습니다. 그는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카를 5세 등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에 대한 대가로 광산과 무역의 독점권을 획득했습니다. 막시밀리안과 카를 5세는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푸거가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빌려준 것입니다. 푸거는 일정한 지역이나 기간 동안 광산 운영, 무역 거래 등에서 홀로 이익을 독점하고, 다른 사업가들은 참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푸거는 독점이 최대의 부를 창출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공급을 장악하면 값을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푸거는 막대한 수익을 올려 다시 다른 곳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 푸거라이의 건설


유럽의 초기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도시와 화폐, 경제가 성장했지만, 동시에 사회 양극화, 빈곤 확산 등 사회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루터가 종교 개혁을 주장하며 사회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농민 전쟁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 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와 루터의 지지자 후텐 등은 푸거와 푸거 가문을 비판했습니다. 후텐은 “푸거의 경영 방식은 공익과 공정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이며, 푸거 가문의 높은 이윤 추구는 정당한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고, 루터는 “푸거 가문의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푸거와 푸거 가문은 ‘푸거라이’라는 도시를 건설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을 없애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도 과시하기 위해서였죠. 푸거는 가난한 임금 노동자와 수공업자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사업이라고 홍보했습니다. 푸거 가문은 1516년 아우크스부르크 시내에 부지를 매입하고 연립주택 106채를 건설했습니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가 1굴덴의 임차료를 내고 입주 후 예배와 간단한 기도만 드리면 살 수 있었습니다. 대신 가난하면서도 일하지 않는 빈민이나 거지는 입주가 불가능했습니다. 푸거는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라면 최소한 자기가 살 집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연립주택은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으며 아우크스부르크의 관광 명소로 남아 있습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유럽 최고의 부자#야코프 푸거#초기 자본주의#푸거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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