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의 금비녀와 금반지도 헐값에 빼앗아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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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보유상황조사위원 위촉장 등 심정섭 향토사학자, 본보에 공개
일제, 군비 확보 위해 수탈계획 수립

향토사학자인 심정섭 씨가 5일 일제가 조선인들에게서 금을 헐값에 사들이기 위한 사전조치로 실시했던 금보유상황조사위원 위촉장을 보여주며 일제의 경제 수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향토사학자인 심정섭 씨가 5일 일제가 조선인들에게서 금을 헐값에 사들이기 위한 사전조치로 실시했던 금보유상황조사위원 위촉장을 보여주며 일제의 경제 수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일제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자금 확보를 위해 조선인들의 금비녀와 금반지 등을 헐값에 빼앗는 치밀한 경제 수탈계획을 추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향토사학자인 심정섭 씨(76·광주 북구)는 5일 본보에 ‘금보유상황조사위원 위촉장’을 공개했다. 가로 18cm, 세로 26cm 크기 위촉장에는 1940년 10월 25일 전남도가 민간인 김모 씨를 금보유상황조사위원으로 위촉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937년 중국을 침략하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물자와 건설자재 수요가 급증하자 조선을 대륙침략 병참기지로 삼았다. 일제는 다양한 한반도 자원 중에서 특히 금과 무연탄에 관심이 컸다. 금은 당시 세계 화폐기능을 했고 무연탄은 해군 선박의 연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일제는 동남아 국가에서 석유와 고무를, 미국에서 고철을 수입할 때 지불해야 하는 금을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조선인들이 갖고 있던 금비녀·반지, 금시계 등을 빼앗는 수탈 계획을 짰다.

일제는 1937년 친일 성향의 조선 상류층 여성들에게 애국금차(금비녀)회를 만들게 했다. 애국금차회를 통해 금비녀, 금반지, 금귀이개를 조선군사령부에 전달하는 쇼를 연출했다. 강제로 금을 수탈할 경우 조선인들이 반발해 민심 동요가 커질 것으로 우려했던 것이다. 일제는 금비녀 등을 납부한 것을 국방헌금으로 미화하며 조선인들에게 금을 내놓으라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일제는 이후 1940년 9월 금보유상황조사규칙을 제정했다. 규칙에는 금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 주소, 직업은 물론이고 개인 보유량도 구체적으로 기록하도록 했다. 심 씨가 공개한 위촉장은 규칙 제정 이후 조선인들의 금 보유량 조사를 할 사람을 임명했다는 뚜렷한 증거다.

일제는 이어 1940년 11월 금보유상황 조사를 시행했다. 조선인들이 갖고 있던 모든 금을 샅샅이 확인해 수탈근거 자료를 만들었다. 박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47)는 “조선총독부는 조선산금매입㈜을 만들어 금 유통을 장악한 뒤 시세보다 싸게 금을 사들였다”며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처벌하는 등 강압적인 금 매입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말했다.

이에 심 씨는 “금반지 등을 내놓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일제 순사의 협박에 하는 수 없이 금반지를 줬다는 말을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들었다”며 “힘이 없어 경제수탈을 당하는 역사적 아픔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심 씨는 또 일제가 학생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만들기 위해 고등보통학교(고등학교)에 일본 현역 장교를 상주하게 해 전투훈련을 시킨 것을 입증하는 교련검정합격증서도 공개했다. 조영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보유상황조사위원 위촉장이나 교련검정합격증서는 치밀했던 일제의 수탈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중일전쟁#태평양전쟁#금보유상황조사위원 위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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