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 한국[횡설수설/신연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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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쌀가마니를 지고 올라온 수만 명의 농민들이 “쌀 수입 개방 반대” “우루과이라운드 반대”를 외치며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구한말 나라를 넘겨준 ‘을사늑약’에 농산물 수입 개방을 비유해 ‘제2의 을사조약’이라는 비난까지 나왔다. 당시 세계 각국의 농산물 개방을 결정한 우루과이라운드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협상의 하나로,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로 발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글로벌 생산액의 절반을 차지했던 미국은 ‘세계 모든 나라가 자유무역으로 번영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GATT와 이를 이어받은 WTO 출범에 산파 역할을 했다. WTO는 GATT에 없던 무역 분쟁 조정과 판결 기능까지 갖춰 한층 강력한 세계 자유무역의 수호자가 됐다. 수출 주도의 성장 전략을 택한 한국은 농민 등 일부 계층의 희생이 따르긴 했지만 자유무역의 혜택을 받아 발전한 나라의 하나다.

▷자유무역의 수혜자이자 수호자였던 미국이 다른 나라들의 추격으로 제조업이 쪼그라들고 국내 빈부격차가 심해지자 WTO를 흔들어대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WTO는 재앙”이라며 탈퇴를 공언하기도 했다. 취임 후에는 회원국 모두를 동등하게 대해야 하는 WTO 협약을 무시하고 안보를 이유로 특정 국가에 고율의 관세를 매기는 등 WTO 시스템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는 WTO의 개발도상국 체계를 문제 삼고 나섰다. 그는 26일 트위터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WTO 규칙을 피하고 특혜를 받기 위해 개도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90일 이내에 변화가 없으면 미국 독자적으로 이들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철회할 것을 시사했다. 중국이 주 타깃인 듯하지만 한국 홍콩 멕시코 등도 거론됐다. 미국은 주요 20개국(G20) 회원 등 4가지 기준을 제시했는데 한국은 모두 해당한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은 한국이 언제까지나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나온다.

▷WTO에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면 관세율을 더 낮춰야 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도 제한이 생긴다. 한국은 공산품 분야에서는 이미 선진국 수준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 큰 문제가 없지만 농수산물 분야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현재 500%가 넘는 쌀 관세를 낮추고 보조금도 줄여야 한다. 다른 개도국들의 반대가 심해 당장 WTO 개도국 체계가 바뀌지 않을 수는 있지만 양자 협상으로 요구받을 가능성에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개발도상국#wto#트럼프 대통령#자유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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