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봉투와 테이프가 탈출 도구? 한국형 클라이밍 액션극 ‘엑시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8일 14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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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국내 한 신도시의 화학회사 건물 앞에서 유독가스를 가득 실은 탱크로리가 폭발했다. 회색 연기는 소리 없이 움직이는 뱀처럼 도심 골목 곳곳으로 기어들어 건물을 삼키듯 위로 올라온다. 도심 한복판 컨벤션 센터에서는 칠순 잔치가 한창이고 가족들이 상황을 알아차렸을 무렵에는 이미 건물 입구가 가스로 봉쇄된 뒤였다.

전개가 이쯤 되면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을 쏘며 나타나거나 아이언맨이 날아와 가족들을 옥상으로 대피시킬 것 같지만 영화 ‘엑시트’(31일 개봉)에서는 산악부 출신 백수 용남(조정석)과 컨벤션센터 직원인 동아리 후배 의주(임윤아)가 밧줄을 고쳐 묶는다. 이들은 거미줄 대신 간이 완강기, 수트 대신 쓰레기봉투와 테이프를 탈출 도구로 삼는다. 가족들을 탈출시키고 마지막으로 남은 두 사람이 게임 스테이지를 깨듯 유독가스가 닿지 않는 높은 건물로 오르고 오르는 과정이 영화의 백미다.

24일 서울 강동구 영화제작사 ‘외유내강’에서 만난 이상근 감독이 겸연쩍어하며 고백했다.
“저도 비루한 몸을 이끌고 직접 배워봤습니다. 떨어지기도 하면서 클라이밍을 직접 해보니 제대로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직 상승 액션’은 꼼꼼한 사전 준비와 실제 훈련으로 이뤄졌다. 클라이밍 애호가 관객들이 보며 쓴웃음을 지을까봐 이 감독은 ‘기본 동작 만큼은 제대로 찍자’ 생각했다. 로프로 매듭을 만드는 배우들의 손동작도 수백 번 반복해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자동반사로 나올 정도로 연습을 거쳤다. ‘루트 파인딩(길 찾기)’이나 ‘완등 가자!’ 같은 대사는 실제 클라이밍 스포츠에서 쓰는 표현이다.

용남과 의주가 밧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건물 사이를 오갈 때 마다 관객들도 함께 긴장감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헬스장 건물과 보습학원 건물 사이의 간격이 그만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틈날 때 마다 을지로 등을 걸어 다니며 실제 건물 간격을 확인하고 건축 조례까지 찾아봤어요. 건물 사이 간격이 불과 3~4m일 때 느껴지는 긴장감이 이번 영화만의 특징입니다.”

용남이 타고 오르는 건물은 돌잔치·칠순잔치에 특화된 컨벤션 센터. 도심 속 웨딩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묘하게 촌스럽고 겉도는 그리스 신전 같은 장식들이 영화에서는 탈출을 위한 클라이밍 루트가 된다. 김자인 선수의 오빠이자 클라이밍 챔피언인 김자비 선수가 두 주연 배우를 훈련시키는 한편 영화 제작 단계부터 미술팀과 협업했다. 김 선수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지목한 루트에 한국 특유의 대형 원색 간판이나 건물 장식을 배치해 동선을 구성했다. 건물의 높이, 양 팔을 벌렸을 때 닿을 수 있는 벽돌의 위치까지 디테일한 조언이 반영됐다. 덕분에 용남과 의주는 건물 외벽에 달린 킹크랩 모형이나 치과 간판, 사자 머리 장식을 타고 끊임없이 탈출로를 찾는다.

한국적 간판과 건물 외벽 장식이 탈출의 디딤돌이 되었다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품을 탈출 수단으로 활용한 아이디어도 눈에 띈다. 칠순 잔치에서 쓰인 앰프는 옥상에서 구조용 마이크로 돌변한다. 주인공들이 비장하게 입은 탈출 ‘수트’는 쓰레기봉투와 테이프를 동여매 만들었다. 이 감독은 분필을 미끄럼 방지용 파우더처럼 사용한다는 것을 ‘철봉매니아’ 카페에서 발견해 시나리오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맥가이버도 흔한 물건을 조합해 위기를 돌파하잖아요. 주변의 물건들을 입고 쓰고 뛰는 모습으로 젊은이들의 역경과 고난을 재치 있게 표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내가 여기서 나가면 저렇게 높은 회사에만 원서 낼 거야!’라는 용남의 외침처럼 용남과 의주는 영화 내내 온갖 잡동사니를 이용해 기어오르고 뛰어넘어 가스를 피해 더 높은 곳을 향해 질주한다.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 유독가스인지, 청춘을 둘러싼 답답한 취업난인지 불분명하지만 이들은 장애물을 만날 때 마다 최선을 다한다. 마흔 넘어 첫 장편영화로 데뷔한 이 감독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투영돼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재주라도 적재적소에 쓰일 날이 분명히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위기를 타개할 때 우리가 느낀 카타르시스를 관객들도 함께 느껴주시겠죠?”

이서현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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