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일본 수출통제의 노림수는 ‘한국 쥐락펴락’
더보기

일본 수출통제의 노림수는 ‘한국 쥐락펴락’

최석영 전 주제네바 국제기구 대표부 대사입력 2019-07-13 13:13수정 2019-07-13 13:38
뉴스듣기프린트
트랜드뉴스 보기
정치로 푸는 게 우선, 기업은 묘수가 없어
[shutterstock]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반자유무역 정서가 확산되면서 국제 통상 질서는 전대미문의 변화를 겪고 있다. 미국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철강과 알루미늄, 자동차 수입 제한 조치를 취하고 대중국 관세 인상, 투자 제한 및 수출통제 강화를 추진해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경쟁이 격화하고 있다. 미국은 다른 한편 북미자유무역협정(미국·캐나다·멕시코협정·USMCA) 타결 후 일본과 유럽연합(EU)을 압박해 새로운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과거 일본과의 영토분쟁을 계기로 희토류 수출을 금지했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이유로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 조치를 풀지 않고 있다. 강대국의 보호주의와 일방 조치가 만연하면서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한 다자통상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일본은 7월 1일 한국에 대한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일본 통산성은 ‘수출통제 분야를 포함한 한일 간 신뢰관계 훼손을 이유로 2단계 조치를 취한다’는 정령 개정안이 들어간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우선 감광제 리지스트, 불화수소(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핵심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허가 절차를 엄격히 관리하고, 국내 절차를 거쳐 8월 중 ‘화이트 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 조야는 강력한 항전 의지를 표명한 가운데 피해 기업의 수장들은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

무역자유화와 규제라는 이중 장치

전후 국제사회는 무역자유화와 안보 목적의 무역규제라는 상반된 목표를 추구해왔다. 무역자유화를 통해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다자간 무역체제와 병행해 국제평화 및 안전을 위해 비확산 조치와 수출통제레짐을 발전시켜온 것이다. 다자간 비확산체제는 대량살상무기(WMD)와 미사일 등 운반수단의 확산을 직접 통제하는 비확산조약, 생물무기협약, 화학무기협약 및 무기거래협약 등 구속력 있는 조약체제와 함께 이중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장비, 물품 및 기술의 수출을 통제하는 핵공급국그룹(NSG), 호주그룹(AG),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와 재래식 무기 확산 통제를 위한 바세나르체제(WA) 등 4대 수출통제체제로 보완, 운영하고 있다(표1 참조). 후자는 40여 개국이 참여하는 자발적 협력체제로 규제 대상 품목과 기술이 1000개를 훌쩍 넘는다.

주요기사

당초 공산권에 대한 수출통제를 위해 만들어진 코쿰(COCOM) 리스트에서 출발한 국제수출통제 체제는 WMD 또는 테러 활동으로 전용하지 않도록 이중용도 품목의 수출을 엄격히 통제해왔다. 예를 들어 시계나 안경 부품으로 사용되는 티타늄 합금은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의 핵심 부품으로 활용될 수 있고, 샴푸나 인스턴트커피에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경우 생화학무기로 전용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품목의 수출을 규제하는 것이다.

일본은 외국환 및 외국거래법과 그 하위법령으로 수출통제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수출통제는 리스트에 등재된 장비, 물품, 기술을 규제하는 방식과 리스트에 없더라도 WMD로 전용할 수 있는 물품에 대한 상황 허가(catch-all)로 대별된다. 상황 허가는 최종사용자(end-user)에 대해 통제하는 제도로, 수출자는 통산성에 수출 품목과 최종사용자의 상세 정보를 제출하고 수출 심사를 받아야 한다. 수출 품목이 전용될 위험성이 있다고 수출자가 판단하거나 정부 당국이 위험을 고지한 경우 별도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다. 미국 9·11테러를 계기로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540호로 적용 범위가 더욱 엄격해졌다.

한일 갈등은 동북아 안정까지 위협

일본은 수출허가를 한번 받으면 3년간 유효한 일반포괄승인대상국인 화이트 국가 리스트에 한국을 포함해 27개국)을 지정해왔다(표2 참조). 이 리스트에서 빠지면 광범위한 품목에 대해 매번 수출허가를 받아야 하고 복잡한 절차 및 승인 결과의 불확실성으로 무역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이번 조치는 계획적이고 비우호적인 것으로, 장기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본 정부가 자발적 성격의 수출통제체제에 따라 한국에 주던 허가 면제 특혜를 철회하는 것일 뿐 차별 조치는 아니라고 강변한 것은 일본이 자의적으로 리스트 포함 여부와 수출 절차를 쥐락펴락하겠다는 의미다. 또한 일본 국가안보와는 무관한 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를 걸어 한국을 ‘국제법을 무시하는 신뢰할 수 없는 나라’로 매도하면서 자국의 수출통제조치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장기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미국과 중국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역규제, 투자 제한 및 수출통제 강화 등 일방적인 경제 압박 조치를 취하고 있음에도 다자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 또한 일본에게 좋은 빌미가 됐을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7월 9일 오전 정례 브리핑에서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철회할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AP=뉴시스]
한일 양국은 역사 인식을 둘러싼 해묵은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과거사를 정리했고 그간 여러 차례 사과성명으로 일제의 과오를 반성했다고 하면서도 이를 부인하는 언행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의 이런 이중성에 분노하면서 진정한 사과를 요구해왔다.

한편,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지만 ‘잃어버린 20년’을 겪고 중국의 부상을 목도하고 있는 일본의 남다른 고민과 좌절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일본 내 친한(親韓) 인사는 떠나고 우익들의 혐한 시위는 도를 넘은 지 오래다. 한국 역시 교체되는 정권마다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일관성 없는 대일정책에 경도돼왔다는 점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한일관계의 악화는 결국 한미일의 전략적 협력 구조를 약화시켜 새롭게 짜이는 인도·태평양지역의 세력 균형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역으로 양국이 신뢰를 쌓고 진정한 협력으로 나아간다면 북핵 문제 해결에 일조하고 역내 세력 균형과 공동번영을 이루는 초석이 될 것이다.

경제인 면담보다 한일 고위급 협상이 시급

문재인 대통령이 7월 10일 청와대 충무실에서 열린 ‘경제계 주요 인사 초청 간담회’에 참석해 일본의 반도체 관련 수출규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뉴시스]
실타래처럼 엉킨 양국의 갈등 속에서 한국의 핵심 산업을 정조준한 일본의 수출통제에 대응할 방법은 없을까. 양국 정상의 대승적 결단과 정면 돌파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정치·외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금언을 진정한 자세로 실천하면 된다. ‘김대중-오부치 게이조의 한일공동선언’의 정신이 귀감이 될 수 있다.

정상의 지시 아래 강제징용 문제를 포함해 역사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을 일괄적으로 다루는 고위급 협상팀을 가동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뢰 회복과 진정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기 위한 허심탄회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2015년 12월 성급하게 발표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양국 선언이 불충분한 내용과 형식으로 작성돼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점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무엇보다 한일 모두 확전을 자제하고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정치 선동과 맹목적 애국주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권과 언론이 중심을 잡아야 하는 이유다. 물론 협상 개시는 일본이 이미 발표한 조치를 철회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맞대응에는 신중해야 하지만, 협상 결렬에 대비해 가용한 대일 보복 조치의 실효성과 한계를 점검하고, 일본의 추가 보복 가능성과 그 영향도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 대응 조치를 장단기로 구별하되, 궁극적으로는 역대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대일 의존의 실질적인 감소에 국력을 쏟아야 한다. WTO 등 국제 규범에 호소하고 우방국의 지지 여론도 확보해야 한다. 미국의 중재가 필요하지만 한일 간 진정한 대화 없이는 그 역할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또한 반복적인 사죄 요구보다 진정한 반성에 인색한 일본의 한계를 인지하고 용서를 포함한 창의적 해법도 강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과거가 잊히거나 도덕적 우위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격동하는 전략 지형의 변화 속에서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대의가 더 절박하기 때문에 긴 호흡으로 보자는 얘기다.

최석영 전 주제네바 국제기구 대표부 대사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97호에 실렸습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주요뉴스

1/3이전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