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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 곡의 유령… 우리의 ‘원본’들은 잘 있을까[임희윤 기자의 죽기 전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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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 곡의 유령… 우리의 ‘원본’들은 잘 있을까[임희윤 기자의 죽기 전 멜로디]

임희윤 기자 입력 2019-07-05 03:00수정 2019-07-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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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유니버설스튜디오. 동화처럼 평화로운 정경이지만 11년 전 화재와 함께 묻힌 비밀이 폭로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동아일보DB
임희윤 기자
2008년 6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유니버설스튜디오에서 큰불이 났다. 스튜디오 중 6197번 건물이 전소했다. 그곳에는 영화 ‘킹콩’을 소재로 한 놀이기구와 촬영지, 전시관이 있었다. 스튜디오는 빠르게 복구됐다. 스튜디오는 세계 최대의 영화 관련 문화시설의 명성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날, 즉 2008년 6월 1일에 6197번 건물에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큰 손실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무려 11년이나 지난 최근에야 밝혀졌다.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폭로 보도 때문이다. 6197번 건물은 이제 ‘18번 격납고’만큼이나 충격적인 비밀을 품은 장소가 됐다. 지구에 불시착한 UFO를 미군 당국이 비밀리에 옮겨 조사했다는 루머로 유명해진 오하이오주의 건물 말이다.

#1. 그날 불에 탄 것은 영화 관련 자료만이 아니었다. 유니버설스튜디오의 창고에는 유니버설뮤직그룹의 마스터테이프도 대량 보관돼 있었다. 유명 음악가들이 명곡, 명반을 녹음한 역사적 원본 테이프 말이다. 약 10만 개의 테이프에 든 50만 곡 분량의 마스터가 그날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니버설 측은 그간 이 사실을 숨겨 오다 뉴욕타임스의 보도가 나오자 뒤늦게 인정하며 실태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대중음악사 최대의 비극적 비밀을 요즘 같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시대에 자그마치 11년이나 묻어온 유니버설의 무거운 입에 경의를 표해야 할 지경이다.

#2. 여러 음악가들은 즉각 항의하며 자신의 마스터테이프도 소실됐는지 유니버설 측에 문의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가 공개한, ‘정확하지 않으나 그날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스터테이프’의 목록은 충격적이다. 로큰롤의 역사적 초기 명곡인 빌 헤일리의 1954년작 ‘Rock Around the Clock’은 시작에 불과하다. 척 베리, 존 콜트레인, B B 킹, 이글스, 에릭 클랩턴, 엘턴 존, 너바나, 에미넘까지 약 700명의 음악가로 그 규모가 방대하다. 전부 사실이라면 앞으로 매년 6월 1일마다 전 세계 음반점에 조기라도 게양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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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니버설뮤직그룹 측은 책임을 인정했지만 이 손실이 상징적인 의미 이상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날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거의 모든 원본은 이미 디지털 아카이브화하거나 CD 등 다양한 매체로 재발매했기에 어떤 식으로든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루시언 그레인지 유니버설뮤직그룹 회장은 보도 뒤 전 세계 직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향후 소중한 원본 보존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는 후문이 들린다.

음악이 마치 종교적 성령처럼 전 세계에 무형으로 떠다니는 스트리밍의 시대임에도 원본 테이프가 지닌 의미는 작지 않다. 루브르박물관에 걸린 모나리자 그림을 전 세계인이 구글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원본 모나리자는 어디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마스터테이프는 그 자체로 미술 작품처럼 질량과 부피가 있는 유물이다. 현재 인류가 지닌 디지털 전환 기술이 과연 완벽하냐는 질문도 가능하다. 100년, 1000년 뒤 원본의 실감을 더 생생히 전할 기술이 나왔을 때 우리는 마스터테이프를 다시 꺼내야만 한다.

#4. 음반사 직원 A 씨는 얼마 전 영국 본사의 비밀 창고에 갔던 이야기를 내게 해줬다. 이름만 대면 음악 팬들의 입이 벌어질 기록물이 빼곡했다고 한다. B밴드가 처음 그 음반사와 쓴 계약서 원본, C밴드의 홍보용 싱글…. 마스터테이프들은 물론이다. 그곳 직원은 내부자라 할 A 씨에게조차 ‘이곳만은 개인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고 한다. 몇 년 전 방문했던 미국 시애틀의 ‘팝 컬처 박물관’의 신기한 소장품들이 떠올랐다. 지미 헨드릭스와 커트 코베인이 연습장에 적은 명곡의 자필 가사, 명반 ‘London Calling’의 표지 사진 속에서 밴드 ‘클래시’의 베이시스트가 바닥에 내려쳐 부순 베이스기타의 파편….

#5. 음반사 직원 B 씨는 1990년대 후반 가요 음반들을 LP로 그럴듯하게 재발매하고 싶은데 마스터테이프, 또는 판권 보유자를 못 찾아 낭패라고 했다. 불과 20년도 안 된 원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합자 회사가 망하면서 판권이 공중분해하거나 마스터테이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가 연락이 두절된 경우가 허다해요. 음반을 못 내게 된 것도 답답하지만 역사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 아쉬움을 말로 어찌 표현해요.”

#6. 쿨하고 편리한 디지털 시대, 우리 문화의 원본들은 어디 있을까. 부디 다들 잘 지내길. 어디에 있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유니버설스튜디오#마스터테이프#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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