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의 세계화? 단순히 김치 잘 먹는 타지인보다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20일 14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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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면 항상 언어를 조심해야 한다. 민원인을 대할 때는 언제나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해야 하고, 보고서 쓸 때는 애매한 문구 없이 명확하게 써야 한다. 이 일을 하면서 많은 어휘 및 용어를 배우게 됐다. 억지로 잊은 단어도 있었다. 서울시에서 외래어 순화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어 내게 사용하기 쉬운 여러 영어에서 도입된 단어 대신 순 한국어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영어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카페나 축제의 이름, 광고, 간판, 기업 구호 등 한국의 거리에서 영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영어가 모국어인 외국인의 입장에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문법이나 어휘가 어색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로마자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더 지독한 상황은 아이들까지 입는 티셔츠에서 비속어 및 부적절하고 불쾌한 음란 문구를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이런 현상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뉴스가 있었다. 화제가 되고 있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영어 자막이다. 그동안 한국 영화에도 영어 자막은 있었는데 왜 유독 이번 자막의 역할이 컸다는 걸까?

기생충의 자막은 아주 간결하고 문맥상 요점을 정확히 전달한다. 예를 들어 카카오톡을 영어권에서는 익숙한 메신저 왓츠앱으로 바꿈으로써 영어권 관객이 대사를 실감 나게 느끼게 만들 수 있다. 언어는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라서 한 문단 혹은 한 문장만 읽어도 외국인이 썼는지, 원어민이 썼는지, 혹은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썼는지 알 수 있다. 영화처럼 현실에 기반을 둔 허구 예술이나 책과 같이 글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매체는 몰입을 위해 원어민의 감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생충의 자막에는 한국 영화에 열정을 가진 미국인 달시 파켓이 있었다. 그의 첫 한국 영화 리뷰를 본 것은 2000년대 초로 기억한다. 다른 리뷰어들과 비교해 그의 리뷰는 조금 더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을 뿐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국 영화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그를 만났을 때마다 전문성이 조금씩 더 커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은 부산에서 영화를 가르친다. 그는 기생충 자막을 만들며 대사 한 줄, 한 단어를 고심해 번역했고 어떻게 하면 더 자연스럽게 영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 여러 번 검토했다.

영화를 예로 들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이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외국인들은 한옥을 사랑하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를 비롯해 꽤 많이 있다. 뭐, 사실 우리 한국블로그 칼럼니스트 5명도 이 안에 포함시켜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비밀이 숨어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영화자막을 비롯한 책 등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콘텐츠는 원어민 감수는 고사하고 그저 로마자로 써있는 것이 전부인 것들이 아주 많다. 어떤 사람들은 영어처럼 보이면 만족하는 것 같다. 감수시키더라도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요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좋은 영어로 돼 있더라도 한국어 원본과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글로 쓰여 있어도 문법과 뜻이 맞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듯이 로마자로 써있어도 이해할 수 없으면 외국인에게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한국 문화를 알린다며 사명감에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한국 문화에 부끄러울 정도의 글도 많아 차라리 그런 자막이나 책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 중에는 한국이 좋아서 살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매년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이해가 높고 문화를 사랑해 단순히 젓가락 잘 쓰고 김치 잘 먹는 타지인이 아니라, 한국과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줄 수 있다. 외국인이라 한국을 모른다고 배척하기보단 그들이 마음껏 한국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면 어떨까? 물론, 감수를 맡겼다면 적절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상식이다.

폴 카버 영국 출신·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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