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내탓 아니라는 생각”… 성폭행 피해 18년만에 용기낸 증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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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2001년 서울 중랑구 가택침입 ‘그놈’ 추적기

2001년 8월 6일 오전 10시. 서울 중랑경찰서 관내 한 파출소로 한 통의 신고전화가 걸려 왔다. “모르는 남자가 흉기로 위협하며 성폭행을 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한 중랑서 강력2팀 형사는 신고자가 불러준 주소지 원룸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청소를 막 끝낸 것처럼 말끔했다. 흉기를 든 남성이 침입한 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방 한쪽에는 매트리스가 반듯이 깔려 있었다. 선반 위 두루마리 휴지와 TV 리모컨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피해 여성은 신고를 하면서 ‘남자한테 저항하는 과정에서 다쳐 피를 흘렸다’고 했다. 하지만 집 안은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다.

집안 곳곳을 살피던 경찰은 휴지통에서 정액이 묻은 휴지를 발견했다. 경찰은 성폭행이 있었는지 물었다. “흉기로 위협하면서 성폭행을 하려 했지만, 실제 성폭행은 없었습니다.” 경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성폭행 피해는 없었다’고 여성이 딱 잘라 말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정액 묻은 휴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넘겼다. 침입 남성에게는 강간미수 혐의를 적용했다.

당시 여성이 거주하던 주택가 골목엔 폐쇄회로(CC)TV가 없었다. 경찰이 남성의 인상착의에 대해 물었지만 여성은 “정신이 없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경찰은 피해 여성 집 주변을 탐문하면서 두 달간 수사했다. 하지만 용의자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경찰은 그해 10월 이 사건을 미제 사건 리스트에 올렸다. ‘그놈’이 남긴 건 정액과 피가 묻은 휴지가 전부였다.


○ 17년 만에 밝혀진 ‘그놈’

2001년 서울 중랑구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의 범인을 18년 만에 검거한 중랑경찰서 강력3팀이 7일 오전 수사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이들은 미제로 남아 있던 사건에 대한 재수사로 18년 전 ‘그놈’을 법정에 세웠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001년 서울 중랑구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의 범인을 18년 만에 검거한 중랑경찰서 강력3팀이 7일 오전 수사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이들은 미제로 남아 있던 사건에 대한 재수사로 18년 전 ‘그놈’을 법정에 세웠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018년 4월 15일. 중랑서 강력3팀 앞으로 한 통의 공문이 도착했다. 대검찰청이 보낸 것이었다. 공문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01년 중랑구 강간미수 사건의 성명 불상 피의자 DNA와 수형자 중 한 명의 DNA가 일치한다.’ 강력3팀장은 곧바로 경찰서 지하 1층 서고로 갔다. 미제 사건 서류들을 모아 놓은 캐비닛이 여기에 있다.

‘그놈’은 다른 특수강도강간 범죄로 2010년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살인과 성폭행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수형자의 DNA를 수사기관이 보관하도록 하는 ‘DNA 정보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이해 4월부터 시행됐다. ‘그놈’의 DNA도 데이터베이스(DB)에 올랐다. 국과수가 원래 갖고 있던 DNA 정보와 DB에 등록된 수형자 DNA 대조 작업을 벌이던 중 ‘그놈’ 신원이 17년 만에 밝혀졌다. 2010년부터 DNA 등 가해자와 관련된 과학적 증거가 남아 있는 성범죄의 경우 공소시효가 10년 더 연장돼 잡기만 한다면 처벌할 수 있었다. 법이 바뀌지 않았다면 사건의 공소시효(10년)는 2011년 8월이었다.

수사팀은 재수사에 착수했다. 17년 전 작성한 피해자 진술조서와 현장 증거사진 등을 다시 샅샅이 훑었다. 그런데 수사팀은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사건 당일 피해 여성의 집에서 정액이 묻은 휴지가 발견됐는데도 피해자 진술조서에는 “성폭행은 당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흉기를 들고 위협하는 남성에게 저항하다 다쳐 여성이 피까지 흘렸다고 돼 있는데 바닥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신원을 확인한 ‘그놈’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에 대한 여성의 설명이 절실했다.

수사팀은 피해 여성을 찾기 위해 전국 곳곳을 훑었다. 그러다 경찰은 여성이 한국을 떠나 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사팀은 여성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수도권의 한 도시로 찾아갔다. 하지만 어머니도 여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없었다. 인근을 수소문하던 중 만난 여성의 한 친척은 “가족들이 모두 외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수사팀은 2001년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들의 근무지까지 찾아갔지만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 수사팀은 결국 재수사에 착수한 지 넉 달 만인 2018년 8월 ‘그놈’을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그런데 넉 달 뒤 강력3팀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공항경찰대 관계자였다. 2019년 2월 여성이 인천국제공항으로 들어온다고 알려줬다. 강력3팀장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친척을 통해 알게 된 어머니 거주지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성의 어머니는 딸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따님이 18년 전 서울에서 있었던 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입니다. 반드시 확인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어머니는 딸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수사팀은 전화도 하고 문자도 남겼다. 하지만 여성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메시지에 답도 없었다. 그러다 하루 뒤 수사팀 한 형사의 휴대전화에 발신지가 외국인 번호가 떴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여성은 ‘이번에 남편도 한국으로 같이 들어가기 때문에 만나기 곤란하다’고 했다. 그래도 경찰은 계속 설득했다. ‘그놈’을 처벌하려면 피해자 진술이 꼭 필요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일은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말도 건넸다. “인천공항에서 뵈어요.” 5분가량에 걸친 통화 끝에 여성은 수사팀과의 만남을 받아들였다. 여성은 “조용한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 18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그놈’

“처벌을 원치 않으시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처벌을 원하신다면 끝까지 수사하겠습니다.” 강력3팀 수사관 2명은 올해 2월 인천국제공항에서 여성을 만나 이렇게 얘기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처벌을 원합니다.” 여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68∼170cm의 키에 스포츠머리, 베이지색 반팔티, 흰색 반바지. 여성은 18년 전 ‘그놈’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했다. 수사팀은 올해 2월 인천공항에서 여성을 만났다. 그리고 1시간 30분에 걸쳐 18년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다. “옷 안 벗으면 죽여 버린다”는 목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여성은 자신의 얼굴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그놈’과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여성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칼날을 꽉 쥐었고 손에서는 피가 흘렀다고 했다.

수사팀은 “여성이 당시 성폭행이 있었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성폭행은 없었다’던 예전의 진술을 바꾼 것이다. 18년 전 기억을 떠올리던 여성은 진술을 하다 멈추기를 몇 차례나 반복하면서 띄엄띄엄 얘기를 이어갔다고 한다.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피해자 진술을 다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경찰에게 여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18년 전 자신이 왜 ‘성폭행은 없었다’고 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할 것 같았다.’, ‘문단속을 제대로 안 해서, 아침 9시까지 자고 있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나를 질책할 것 같았다.’ 여성은 성폭행 피해를 부인했던 이유를 경찰에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피해자 진술을 확보한 경찰은 3월 ‘그놈’을 소환했다. 특수강도강간 범죄로 10년간 수감돼 있다 2013년 출소해 자유의 몸이 돼 있었다. 경찰서로 온 그는 18년 전 사건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수사팀은 증거자료 하나를 내밀었다. 2001년 중랑구의 한 원룸 휴지통에서 나온 혈흔의 DNA와 ‘그놈’의 DNA가 일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혐의는 강간미수가 아닌 강간치상이었다. 구속 기소돼 재판에 넘겨진 그는 지난달 법정에 섰다.

진술을 마친 여성은 자리를 뜨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날 일, 제 탓이 아니라는 생각이 이제야 듭니다.”

이소연 always99@donga.com·김재희 기자
#중랑구 가택침입#성폭행#강간치상#중랑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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