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될 뻔한 거사 살려낸 1인 시위 후…자정에 2500명 모여 “대한독립만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31일 15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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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우리의 열화 같은 의지를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었으랴.’(안동 삼일운동 기념비)

경북 안동은 흔히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린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한 갑오변란 직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이 일어난 곳이 안동이었다. 서상철의 안동의병은 구한말 항일의병의 효시였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 병합한 이후 만주로 건너가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들 중에도 안동 출신이 많았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건국훈장 독립장)과 서로군정서와 정의부 참모장을 역임한 일송 김동삼(1878~1937·건국훈장 대통령장)이 대표적이다. 경학사(독립운동단체), 부민단(자치기관), 신흥무관학교(독립군 양성 학교) 등으로 이어진 만주의 독립운동은 안동 출신 100여 가구가 망명하면서 터전이 마련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올해 3월 1일 기준 독립유공자는 모두 1만5511명. 이 중 안동 출신이 359명이다. 기초자치단체들 중에선 안동이 전국에서 가장 많고, 광역자치단체들(서울 416명, 함경북도 411명, 제주 164명)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안동의 독립운동사’가 발행된 1999년에는 안동의 독립유공자 수(247명)가 서울(202명)보다 많았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관장은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51년 동안 전개됐다”며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특히 만주 지역의 항일투쟁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안동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올해 8월에 ‘항일투쟁기 만주지역과 경북인’이라는 주제로 한중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중국 지린(吉林)성 연변(延邊)대와 연변박물관 소속 교수 3명이 참석해 국내 전문가들과 함께 주제 발표를 하고 토론할 예정이다.

● 격렬했던 기미년 안동 만세시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1919년 안동의 만세시위는 특히 격렬했다. 3·1운동 당시 경북에서 일제 경찰·헌병관서 공격이 12차례, 일반관서 공격이 6차례 발생했는데 안동에서만 각각 3차례, 5차례가 있었다.(‘경북독립운동사3-3·1운동’) 1919년 3월 13~27일 사이에는 안동에서 무려 14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23 안동면 시위 땐 일제 군경의 발포로 30여 명이 숨졌을 정도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85년 안동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가 함께 세운 기념비가 낙동강변 월영공원에 서 있다.

안동의 독립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것은 일본 도쿄 유학생들이다.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있은 지 8일 뒤인 1919년 2월 16일, 유학생 강대극이 2·8독립선언서를 갖고 안동 땅을 밟았다. 그는 알고 지내던 안동군청 서기 김원진을 만나 2·8독립선언 소식을 알리고 안동에서도 거사를 일으킬 것을 제안한다. 일제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김원진은 적극 동참 의사를 밝힌 뒤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를 만나 3월 13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태극기와 격문이 비밀리에 제작돼 배포되는 등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하지만 거사 하루 전인 3월 12일 일제의 예비검속에 강대극을 비롯한 주동자 4인이 모두 체포되며 계획은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동생 이상동(건국훈장 애족장)이 나섰다. 그는 13일 오후 안동면 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 글씨가 적힌 대형 태극연을 날리며 만세를 외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그는 붙잡힌 뒤에도 차 위에서 “한국은 독립될 것”이라며 만세를 불렀다.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이상동은 ‘지금이 인심(人心)과 천의(天意)를 명백하게 표시할 정당한 기회다. 동포들은 눈을 들어 독립 대한국 국기를 보라’고 적힌 격문도 휴대하고 있었다. 불발에 그칠 뻔한 거사를 살려낸 이상동의 1인 시위는 이후 안동과 주변 지역에서 펼쳐진 잇따른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 강경 진압에 점차 공격적 시위화

이상동의 1인 시위에 이은 안동면의 2차 시위는 3월 18일에 있었는데 규모면에서 1차와 크게 달랐다. 이날 정오 무렵 안동시장에서 30여 명으로 시작한 만세시위는 유림 및 기독교 세력과 협동학교·보문의숙·동화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가담하면서 규모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동자 14명이 체포되면서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시위는 해가 지면서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앞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계속됐다.

참가자가 계속 늘면서 밤 12시를 넘긴 19일 0시 50분경 시위대 규모는 25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안동면 인구가 5500여 명인 점을 고려하면 성인 면민 대부분이 모인 셈이다. 투석전이 펼쳐지는 등 시위가 점점 격화되자 일본군 수비대는 총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당시 현장을 둘러본 손병선 광복회 안동지회장은 “자정을 넘긴 심야에 2500여 명이나 모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안동은 씨족사회 전통이 강해 지도자들이 지시하면 다 같이 움직이는 구조였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 식민통치기관 안에서 만세시위 모의

안동면 2차 시위 하루 전인 3월 17일에 일어난 예안면 시위도 일제에 큰 충격을 줬다. 대담하게도 식민통치기관인 면사무소 안에서 만세운동이 계획되고 준비됐기 때문이다. 현직 면장이 주동자였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예안면장 신상면(건국훈장 애족장)은 3월 11일 밤 이시교 이남호 등 평소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을 면사무소 숙직실로 불러 장날인 3월 17일에 거사할 것을 제안했다. 뜻을 모은 이들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3월 17일 오후 3시 반경 시위대 30여 명이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에 올라가 일제가 다이쇼 일왕의 즉위를 기념해 세운 ‘어대전기념비’를 부서뜨린 뒤 만세를 외쳤다. 이들의 만세 함성을 신호로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 현장에서 15명이 체포되자 시위대는 주재소로 몰려가 돌멩이와 기왓장을 던지며 구금자 석방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25명이 추가로 붙잡히기도 했다. 체포를 면한 예안면 시위대 600여 명은 산을 넘어 3·18 안동면 2차 시위에 가담했다. 시위를 이끌었던 신상면 면장은 체포돼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윤정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일제 침략을 상징하는 어대전기념비를 무너뜨리는 것을 신호로 만세시위를 시작한 것은 강한 항일·반일 의식을 보여준 것”이라며 “현직 면장이 시위에 적극 가담한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3월 21일엔 임동·임하·길안면 등 3개 면에서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공격적 시위가 펼쳐졌다. 특히 임동면 시위대는 일제 순사와 순사보를 제압한 뒤 주재소에 있던 무기들을 빼앗아 몽땅 우물에 던져버렸다.

● 일본군의 실탄 사격에 하루 새 30여 명 순국

일제는 안동 지역에서 시위가 잇따르고 강도가 세진 것은 초기 대응이 물렀기 때문이라고 자체 분석했다.(‘안동의 독립운동사’) 이후 일제 군경은 여러 면의 연합시위 성격을 띤 3·23 안동면 3차 시위 때에는 강경한 진압작전에 나선다. 일제 군경은 시위 직전 대책회의를 갖고 역할을 분담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했다. 일본 민간인들로 구성된 자경단도 곡괭이 등을 휘두르며 시위대 진압에 가세했다.

3차 안동 시위는 현재의 경안고등학교 자리인 미국 선교사 주택 부근에서 시작됐다. 23일 오후 7시 30분 피워진 불이 신호였다. 안동군의 여러 면에서 온 시위대들이 200~300명씩 나뉘어 움직였다.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을 포위한 시위대 3000여 명은 “경찰서와 법원 안동지원을 파괴하고 구금된 자를 구출하자”고 구호를 외치며 두 기관으로 밀고 들어갔다. 공포탄을 쏘던 수비대가 실탄 사격을 시작하면서 30여 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부상했다. 경북 시군 가운데 가장 큰 인명 피해였다. 시위를 멈추고 산 위로 철수한 시각이 새벽 4시경이었다.(‘안동의 독립운동사’)

▼ ‘독립운동가의 산실’ 임청각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제의 만행은… ▼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이상룡 선생은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5일 찾아간 경상북도 안동의 임청각에는 단체관광객들로 붐볐다.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은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건국훈장 독립장)의 생가다. 석주는 이곳에서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독립운동에 매진하기 위해 일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다. 이곳을 안내하던 문화관광해설사는 “석주가 망명 직전 사당에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으며 독립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임청각은 독립운동가의 산실이기도 하다. 석주를 포함해 임청각에서 태어난 9명과 석주의 부인 김우락 여사, 손부 허은 등 모두 11명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됐을 정도다.

당연히 임청각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제는 만행을 저지른다. 임청각 홈페이지에 따르면 일제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가 자신들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조선인을 지칭한 말)들이 다수 출생한 임청각의 맥을 끊겠다며 1941년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설치한 것이다. 이로 인해 행랑채와 부속 건물들이 철거됐고, 99칸이었던 임청각은 70여 칸으로 규모가 줄었다. 지금도 임청각에선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면 옆 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불편을 겪고 있다.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김호태 사무국장은 “1940년대는 일제가 전쟁을 할 때였다”며 “젊은이들을 입대시키기 위해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 집안이 망해가는 모습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상징인 임청각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어린이날 연휴였던 지난달 4일엔 1000명 이상이 방문했을 정도다. 석주의 증손자인 이항증 전 광복회 경북지부장은 “석주 선생이 세상에 모범을 보여준 분이었다는 사실을 요즘 사람들이 많이 보고 알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청각을 원상대로 복원하려는 정부 계획도 속도를 내고 있다. 문화재청과 경상북도, 안동시는 올해부터 2025년까지 7년간 280억 원을 투입해 임청각을 지나가는 철로를 철거하고, 건물 일부를 다시 짓고, 석주의 독립정신을 알리는 기념관을 건설할 계획이다. 김 국장은 “6월부터 무허가 건물들에 대한 보상이 시작되고 내년 중에는 임청각 안으로 지나가는 중앙선 철로 노선이 옮겨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안동=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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